가을
가을입니다.
노랑물 빨강물 드는 가을입니다.
아니, 노랑물 빨강물 드는게 아닙니다.
드디어 나무는 초록물을 버리고 있습니다.
나는 노랑이었다고
나는 빨강으로 태어났다고
겨울 오기전 마침내 소리치는 가을입니다.
2018년 10월 22일 사무실 앞 단풍나무가 아름다워 쓰다.
살다보니 나도 물들어 초록입니다.
겨울 오기전, 나도 마침내 초록물 버리고 나의 색깔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심고 가꾸어 가는 작은 숲
가을
가을입니다.
노랑물 빨강물 드는 가을입니다.
아니, 노랑물 빨강물 드는게 아닙니다.
드디어 나무는 초록물을 버리고 있습니다.
나는 노랑이었다고
나는 빨강으로 태어났다고
겨울 오기전 마침내 소리치는 가을입니다.
2018년 10월 22일 사무실 앞 단풍나무가 아름다워 쓰다.
살다보니 나도 물들어 초록입니다.
겨울 오기전, 나도 마침내 초록물 버리고 나의 색깔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파란 하늘
너도 봤구나
나도 보았다
그래서 기쁘다
2019년 12월 2일 하늘이 참 좋은 날, 하늘이 예쁘다는 환희의 카톡을 받고 반가워 쓰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p.13
“난 뭘 하기에 너무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아줌마.” p.259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p.268
사랑해야 한다. p.311

문학에 대한 비평과 해설은 내가 느끼고 감동받았던 부분, 그것이 비록 무지와 오해, 과장과 확대해석속에서 받았던 감동일지라도 그 사랑(감동)을 일정부분 훼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강의였습니다.
처음 카프카의 변신을 접하고서 나는 몇 주 같은 생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거 뭐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지? 벌레가 되었다 죽은 이야기는 뭐지? 뭘까?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같은 생각을 하며 산책길을 거닐다 나는 한참을 얼어붙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벌레가 되어 있다면?’
그러면 장차 나에게 일어날 일들을 빤히 보여주고 있었으며,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처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변치 않는 존재인것 마냥 살고 있지만, 나는 어느날 이 가족들 사이에 ‘뚝’ 떨어져서 나의 역할과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상태와 나의 역할이 깨어졌을때, 나의 아내와 나의 딸, 나의 아버지는 나를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아니, 그전에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나는 나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의미. 내 삶의 의미 따위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그저 그 사이에 ‘뚝’ 떨어졌을 뿐입니다. 그러하니, 나는 내 존재의 의미, 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온전하게 존재할때 나와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하니, 나는 나를 누구보다 더욱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니, 나는 다른이들을 힘껏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로빈슨 가족, 존. 모리. 주디. 페니. 윌. 로빈슨, 로봇, 돈 웨스트, 스미스 박사(준 해리스), 앤잴라, 주피터 2호기
로빈슨 크루소가 생각났습니다. 한 40년전에 읽었던 무인도에서의 크루소.
모닥불, 천막집, 떠내려 온 나무통… 그 설레였던 삽화들이 기억납니다. 설레여서 읽었던 책이 언제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로빈슨과 함께 긴장되고 설레였던 그런때가 너무 가물 가물하고 참 그립습니다.
루시우스 보레누스, 타이투스 폴로, 줄리어스 시저, 폼페이우스 매그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브루투스, 키케로, 아티아, 세르빌리아
선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2000년 전 위대한 로마 문명과 함께 그 원시성도 함께 보여줍니다. 날것 그대로여서 좋았습니다.
웨스트월드, 호스트, 로버트, 아놀드, 버나드, 돌로레스, 윌리엄, 테디
우린 갇혔어요 테디.
아름다운 덫이 우리 안에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니까요.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직한 것이었다. p.26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거야. 그래, 그랬었던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 만큼씩 삶은 내 발 아래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 그래, 다 끝났어 죽는것만 남았어. p.110
<어쩌면 내가 잘 못 살아온건 아닐까?> p.110
<만약에, 의식적으로 살아온 내 평생의 삶이 정말로 <<그게 아닌 삶>>이었다면 어떡하지?>
…
<만약에,> 그는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의식만 지닌채, 바로 잡을 겨를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그는 똑바로 누워 지나간 삶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되집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하인에 이어 아내와 딸, 그리고 의사가 차례로 보여준 행동과 말은 모두 간밤에 그가 깨달은 무서운 진실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그게 아닌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든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려버리는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p.118
죽음이 끔직한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가는 삶이었다. p.139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였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 p.192
회사를 다니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었고, 모임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진짜 기쁨은 유튜브와 쇼핑 그리고 게임이었다.
소설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그(게라심)는 진짜 기쁨, <찬란한 삶의 기쁨>을 향유한다. p.195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다른이들과 다른)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 삶은 <그게 아닌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P.198
<그것>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이 대목에서 똘스또이가 사용하는 동사, 즉 보다, 듣다, 느끼다는 모두 감각과 관련된 동사이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각성으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똘스또이에게 깊이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깊이 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행위이다. 바라봄의 윤리적 의미는 아내와의 대면에서 극대화된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헤벌린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빰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 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그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진심으로 바라본 적 없는 아내를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본다. 아내도 그를 본다.
…
시선의 교환이 연민의 교감으로 전이되고 연민의 교감은 최종적인 화해, 즉 주변 사람들과의 화해, 세계와의 화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자신과의 화해로 이어진다. 결국 그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그것>은 연민, 화해, 용서, 그리고 그 모든것들을 포괄하는 사랑이었다. p.199
그는 아들의 눈물을 보았고 아들의 손길을 느꼈고 아내의 절망을 보았고 그들을 용서했고 그들에게 용서를 청했다. 이게 다다. 그는 해방된다. p.201
그러자 갑자기 모든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방향, 열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p.201
단순하고 평범한 삶은 끔찍한 것인가? 아니면 좋은 것인가?
단순하지만 상실되었던 <그것>. 진심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아파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갖고 사는것이다. 이 역시 삶의 방식, Life Style의 문제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꾸지 않았다.
…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p.203
이 기쁨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반이 투병 생활중에 돌이켜 보았던 그 모든 가짜 기쁨들, 유족과 동료들이 복제하는 <기쁨의 느낌>들, 그런 것들이 아닌 진짜 기쁨. 이것이 삶이다. p.204
어떻게 살 것인가?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에 대하여,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는 <그것이 아닌 삶>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톨스토이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뭘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이 질문을 품에 안고 몇 일을 보냈습니다.
처형댁에 김장을 하러 갔습니다. 분주히 김장을 준비하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그 질문이 내게 다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빛이 여러갈래길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톨스토이가 내게 “지금 당장 그곳으로 풍덩 뛰어들라!”라고 명령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서, 김장을 담그는 그 순간에서, 그 시간을 보내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진심으로 바라보고, 가족들과 함께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듯 하였습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팔을 걷어 부치고 그곳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생활방식(life style)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인식하고 선택하는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같은 사건, 같은 사람에 대하여 어떤 태도와 방식을 지니고 대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의식하고, 이해하고, (연민, 화해, 용서를 포함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삶을 대하고 있습니까?
나는 항상 나의 나라, 나의 세상을 꿈꾸지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합니다. 그것을 행하기에 나는 용기가 없고 충분히 게으르기도 합니다.
문득 ‘작은 숲’ 정도는 어떨까 하였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가깝게 쉴 수 있는 곳. 내가 심고 싶은 것들을 심고 가꾸어 갈 수 있는 곳.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곳. 와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 그런 작은 숲 정도는 어떨까 합니다.
나의 작은 숲, my little forest를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