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랭 드 보통
1.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불행만큼 인간이 스스로 사로잡히는 대상이 또 있을까?
어느 미국인 과학자가 이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 발표하였다면, 그 예언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마지막으로 그 최후의 시간에 귀하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귀하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죽음의 위협에 놓인다면, 삶이란 갑자기 우리에게 너무 훌륭해 보일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계획과 여행, 정사, 연구 등을 그것ㅡ 우리의 삶ㅡ이 우리에게 감춰놓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뭐든지 끝없이 미루기만 하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한다면 그런 것들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 만약 이번에 그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잊지 않고 루브르의 새로운 전시실을 방문할 것이고, X양의 발치에 몸을 던질 것이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테니 말입니다.
2.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미적으로 보면, 인간 유형의 수는 워낙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언제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아는 사람을 보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자신의 독자이다.
저자의 작품은 만약 그 책이 아니었으면, 독자가 결코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어떤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시력보조 장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한 증명이다.
3.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1907년 어느 부르주아 청년이 발작으로 어머니를 죽이고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고
…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이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죽는 날에 그리고 종종 그보다 훨씬 더 일찌감치, 아들을 향해서 이렇게 꾸짖지 않을 정도로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끼치는 걱정을 이용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심어놓고 계속해서 불러일으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이용해서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프루스트의 구호인지도 모른다.
“너무 빠르지는 않게요(niale pas trop vite).”
이렇게 너무 빠르지는 않게 지나감으로써 얻는 이득이란, 그 과정에서 이 세계가 훨씬 더 흥미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점이 아닐까? 니콜슨이 보기에는 “예, 우리는 오전 열 시에 모임을 열고’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이른 아침이 악수와 지도와 종이 바스락거 라는 소리와 마카롱 과자를 드러낼 정도로 확장된 것이다. 여기서 유혹적인 달콤함을 가진 마카롱 과자는 우리가 “너무 빠르지는(trop vite)” 않을 때 인식하게 되는 것들을 가리키는 유 용한 상징 역할을 한다.
4.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고통을 겪고 나서야, 무엇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병약함이야말로 우리가 눈치를 채고 배우게 만들며,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몰랐을 과정들을 분석하게 한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
이 슬픔은 우리가 더 행복한 시절이라면 회피했을 일종의 정신적 체육 활동을 거치도록 해준다.
온전한 삶의 기술이란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개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5.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우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듣고 ‘빰, 빰, 빰 하고 훙얼거릴 수 있다. 우리는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멋있던데.”
이 말은 어떤 경험에 대한 설명으로 요청받아 나온 것이지만, 그 표현의 빈곤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대화 상대가 살면서 겪은 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인상의 외부에 머물면서, 마치 성에가 낀 창문 너머로 그 인상을 바라보듯 한다.
클리셰의 문제란,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해질녁에 해는 종종 불타는 듯하고, 달은 은은하게 마련이지만, 만약 우리가 해나 달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이것이야말로그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되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후의 말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애초에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느냐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것이 분명 하기 때문이다
가끔 오후에 하늘에는 하얀 달이 작은 구름처럼 기어올라왔는데, 그 은밀하고 내보임 없는 모습은 마치 한동안 ‘무대에 나올” 필요가 없는 어느 여배우가 평상복 차림으로 “객석 앞”으로 가서 한동안 자기 동료들이 출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러나 여전히 배경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회화에 대한 그의 음미는 이 보다 더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지만, 엘스티르의 작품은 모든 성공적인 예술작품에 현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특히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왜곡된, 또는 간과된 측면을 우리의 시선에 복원해주는 능력이다.
프루스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우리의 허영, 우리의 열정, 우리의 모방 정신, 우리의 추상적 지성, 우리의 습관은 오래 전부터 줄곧 작용해왔으며, 예술의 과제란 이런 것들의 작용을 취소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이제껏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채 놓여 있는 깊이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6.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그리고 우정이란 결국 이런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혼자는 아니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
이 점은 대화의 한계를 부각시켜준 셈이다. 특히 대화를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를 표현하는 장으로 보았을 때에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프루스트 한 사람(그 어떤 대화 상대자라도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이 아니라, 그 이상의 노력의 산물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소설은 그보다 더욱 비판적이며 능숙한 일련의 저자들의 작품이다. (어림잡아도 3명이다. 원고를 쓴 프루스트 1 + 원고를 다시 읽은 프루스트 2 + 교정쇄를 수정한 프루스트 3) 퇴고의 과정에 관한, 또는 간행된 버전에서 창작의 물질적 상태에 관한 흔적이란 당연히 전혀 없으며, 오직 지속적이고 제어되고 홈 없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다.
…
책이란 우리의 습관 속에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악덕속에서 우리가 보여주는 자아와는 또 다른 자아의 산물이다.
“제 경우에는 지적인 일은 어디까지나 제 내면에서만 하기 때문에, 일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면 그들이 친절하고, 성실하고, 기타 등등인 한에는, 그들이 똑똑 하다는 것이 오히려 제게는 다소 부적절하게 생각됩니다.”
프루스트는 종종 “어쩌면” 또는 “아마도” 또는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라는 구절을 이용 하여 자기 문장을 끊곤 했다. 플랑테비뉴가 보기에 이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프루스트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
이런 ‘아마도’라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비관주의적인 날에 프루스트가 내놓는 어떤 놀라운 선언의 맥락에서 마주 하게 될 경우에는 매우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표현이 없을 경우, 그의 선언은 그야말로 지나치게도 파괴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런 생각들은 다음과 같았다 “우정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사랑이란 덫이고. 오직 우리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그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프루스트는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은…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어쩌면 그런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그 유대에 접근하기 때문이리라.
7. 눈을 뜨는 방법
교훈? 찬장에 들어 있는 빵도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개념이 놓일 장소가 되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것, 또한 봄이라는 계절이 아니라 화가를 탓해야 마땅하고, 기억하는 내용보다는 기억력 자체를 비난해야 한다는것.
8.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Q: 그는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A. 음, 아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한계가 유도 사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한계는 항상 주변에 있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과 음미 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데에도 있다.
질베르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그녀가 대접하는 차의 호사스러움. 그녀가 보이는 따뜻한 태도는 결국 그의 삶에서 너무나도 친숙한 일부분이 될 것이며, 나무나 구름이나 전화처럼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요소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하듯이 결국에는 그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역시 자극이 필 요할 것이다.
이러한 간과의 이유는, 프루스트의 개념에서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작중화자 역시 습관의 창조물이며, 따라서 항상 친숙한 것을 경멸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새로운 것만을, 즉 우리를 강타하는 색조의 변화를 우리의 감수성에 갑자기 도입하는 것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산을 바라본 다음에 만약 우리가 눈을 감고 내적으로 그 풍경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결국 그 산의 중요한 세부사항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시각적 정보의 상당 부분은 해석되고, 그 산의 두드러진 특징들도 파악될 것이다. 그 산의 화강암 봉우리, 빙하의 만입, 늘어선 나무 위로 떠도는 안개에 이르기까지, 이런 세부사항이야말로 우리가 이전까지 바라본적은 있었지만, 인식한 적은 없었던 것들이다.
반면 알베르틴은 거의 아무것도 살 수가 없었으며, 뭔가를 사기 전에는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해야 했다. 그녀는 웃을 연구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들이며, 특정한 코트나 모자나 실내복을 꿈꾸었다.
그 결과 알베르틴은 비록 공작부인보다 옷은 더 적었지만 옷에 대한 이해나 음미나 사랑은 휠씬 더 켰다.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우리가 다른 사람이 쓴 책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유익함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한계의 음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와 러스킨의 만남은 독서의 유익함을 예증해준다. ‘내 눈앞에서 이 우주가 갑자기 무한한 가치를 되찾았다.” 프루스트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우리의 지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간 장소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저자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욕망뿐일 때에도 어떤 답변을 주기를 바란다……이것이 바로 독서의 가치이며, 또한 독서의 부적절성이기도 하다.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 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에 놓여 있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에 소개시켜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첫번째 증상 : 우리는 저술가를 예언자로 착각하게 된다.
두번째 증상 :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세번째 증상 : 우리는 예술적 우상숭배자가 된다.
가령 그들은 위대한 화가가 묘사한 교외 풍경에서도 특정한 일부분에만 매달리며, 이것을 그 화가에 대한 음미라고 착각한다. 그들은 그림 속에 있는 대상에만 주의를 집중하는데 이것은 정작 그 그림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반면 프루스트의 심미적 입장의 본질은 기만적이라고 할 정도로 단순한ㅡ 그러나 사실은 매우 중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에 담겨 있다.
“그림의 아름다움이란 거기에 묘사된 사물에 의존하는 것 이 아니다.”
네번째 증상 : 우리는 [되찾은 요리]를 구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다섯번째 증상 : 우리는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테니까.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기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을 넘나드는 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