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 3

5.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화동和同 담론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79

6.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정치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의 세가지라고 대답합니다.
부득이 없애야 한다면? 兵 > 食 > 信 순으로
그러나, 관중이라면 信 > 兵 > 食 P.92

다산의 [목민심서]도 그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탕에는 백성을 기른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식食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삼고 민民의 욕망과 정서를 승인하는 것이 반드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중의 패권논리는 역사적으로 현실 적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P.92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직접민주제가 실현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대의제代議制입니다. 대의제는 중간계급을 승인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이 실은 민民보다 인人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경연처럼 최고 권력까지 규제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치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입니다. 예외없이 이러한 계급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가 장수하는 역설적 이유입니다. P.96

“군자도 궁할때가 있습니까?”
자로의 노여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의외로 조용하고 간단합니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이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 P.102

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16

봉생마중 불부이직 (蓬生麻中不扶而直) – 순자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P.119

8. 잠들지 않는 강물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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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랑하는 예술가

엄마와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 -> 닮았겠구나. 곧 커서 엄마가 되겠구나.

현실을 현실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分하고 석析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해 버립니다. 사과를 쪼개면 그래도 쪼개진 각각의 조각이 여전히 사과입니다. 만약 사람이나 토끼를 쪼갠다고 하면 그 쪼개진 조각을 여전히 사람이나 토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비약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상화, 타자화 하게 되면 이미 우리의 세계가 아닌것이 됩니다. 주체와 분절된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대상과 분절된 주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관념적으로만 가능하고 실험실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의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P.4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 장기수 할아버지
좌경적 이론 :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
우경적 실천 :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 P.43 P.44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체게바라 P.45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P.52

귀곡자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사의 배치가 전투력을 좌우하듯이, 언어의 배치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닉rhetoric(미사여구)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서 ‘說’자는 ‘설’說 자로 쓰고 뜻은 ‘열’悅(기쁠열)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言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틑 레토닉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P.54

상대방을 설특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것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P.55

4. 손때 묻은 그릇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체,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 하여 다른것과의 관계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가지의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 ‘겸손’입니다.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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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책커버
  • 저자 : 신영복
  • 출판 : 돌베게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1. 가장 먼 여행

나는 20년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p.14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 지식은 지식이라기 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P.15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 인식과 성찰이 공부입니다. P.18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도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고생 그 자체입니다. P.18

<머리-가슴-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P.19

2. 사실과 진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쉬르의 언어구조학이 그것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합니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4

영상서사 양식 vs. ‘바다’ 단어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인식이란 양적인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악의 상상력,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을 소중히 계승하되 이것이 갖고 있는 결정적 장단점을 유연하게 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P.29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 중영복 선생님의 강연 中

엽서를 읽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사람들은 그걸 10분 짜리로 착각해요. 나는 그걸 한달 동안 머릿속에서 교정을 반복하며 써요.

누구든 한달을 쓰면 그 만큼 써요.

지식의 지도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매일 보고 고치고 해요.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요.

유법불가 무법불가 有法不可 無法不可
법은 오래된 미래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해요. 그러나 법에 틀에 규칙에 갖혀서는 안돼요.

bookmark_border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최진석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이보다 더 빛나는 한 줄이 또 있을까? 구도자들은 신을 향해 걷는 방식으로 포장해서 사실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고독한 구도자를 닮는다. 구도자들이 보통의 삶을 끊은 채, 자신이 걸어야 할 궤도를 스스로 짠 후, 일부러 거기에만 맞춰 돌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마저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고백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멀어진다는 건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부분은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의 문을 열지도 않는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에는 쉽고도 강하게 빠지면서,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따르는 일은 왜 그리 어려워하는가. 여기서 쉽고 어려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밖에서 오는 ‘바람직함’은 쉽게 알 뿐만 아니라 확신의 힘으로 날렵하게 따르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오는 ‘바라는 것’은 알기도 어렵거니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는 너무 두렵다.

‘바람직함’은 밖에 이미 정해져 있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지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대등한 문법까지도 이미 펼쳐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만 하면 된다. 숙고하거나 사유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신은 심지어 자신에게마저도 비밀스럽다. 자신을 알려면 사유하고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 게으른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밖에서 주어진 것을 살기는 쉽고,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살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에서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겨진 자신을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이 제 자리를 잡는다.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를 살리지 못한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자신은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호기심으로 열린 그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생각이라고도 하고 사유라고도 한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사유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자신을 그 틈새에 끼워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익숙함과 믿음에 균열이 가면서 자신이 열려가는 과정을 “데미안에 의해 눈뜨게 된 사유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어렵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쉽다.

진짜 인간은 세계를 지니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유하여 알려고 한다. “내면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반대로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최초로 번쩍 빛나는 순간, 그는 바로 인간이 된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알려고 하는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당사자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편안하고 안락한 것들에 심한 균열이 가는 것을 경험한다. 회개이자 참회일 수도 있다.

싱클레어의 균열은 거짓말로 시작된다. 거짓말은 가끔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려는 태도인데,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싱클레어는 우선 익숙한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자기 자신 이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자는 멈춰 있는 정해진 자신을 우선 거짓된 존재로 조작해서 거기에 금을 내고 쪼갤 준비를 해야 한다.

‘거짓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 이상으로 넘어가는 도전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싱클레어는 밝고 환하며 기품 있던 세상에서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어둡고 칙칙한 세상과 인연을 맺는다. 모든 새로운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려움 속에서 싱클레어는 어둠을 이미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가족들은 여전히” 밝고 환한 곳에서 멈춰선 채 싱클레어를 “애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밝고 환한 세상의 중심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다. 거짓말을 매개로 “다른 세계”로 추락한 싱클레어는 마침내 “죄를 짓고 불행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영원히 품을 수 없는 세계를 싱클레어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탈하여 이제 싱클레어는 그런 사람들과 투쟁하는 방황을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태어난 세계로는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뿌리를 내려가는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은 평화롭고 밝은 자기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생경해 보이는 풍경이다. 어두운 “다른 세계”와 밝고 익숙한 세계 사이에 끼면 이 생경함의 엄습을 피할 수 없지만, 생경함은 어떤 방도로도 해석할 수 없어 신비의 꿈결 같기도 하다.

방황은 종종 방탕을 낳기도 하니, “방탕한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살기 위한 최상의 준비 활동”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그냥 방탕에 빠진 싱클레어를 가볍게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클레어의 방황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세계에 낀 자의 사명은 방황과 방탕 속에서도 양쪽 세계를 품어야 하는 운명으로 진화하는 일이다.

이 진화를 먼저 해낸 데미안의 모습을 보라. 데미안은 언제나 “자신만의 법칙대로 사는 듯 진귀하고 고독하고 조용하게 걷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걷는 자는 사이에 낀 채 혹은 양쪽을 품은 채 고독하다.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고독한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有)의 세계와 ‘무’(無)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품어야 ‘도’(道)라고 말하는 노자는 아브락사스의 중국판이다. ‘유’와 ‘무’를 동시에 품은 노자도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했다. 양쪽을 품은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인위적 절반에 갇혀 폐쇄적인 자는 사랑을 학습하거나 거래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존재와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고 싱클레어가 “이제 홀로 있을 수 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말 한 것은 자신을 향해 걸었던 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여 문득문득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는 뜻이겠다.

사랑은 고독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자신으로 돌아간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왕국인 것이다. 사랑은 도덕과 무관하다. 도덕은 한 쪽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칼끝이 조금이라도 향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음악을 닮았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도달하여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든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을 닮았다.

신은 고독의 정상에 있다. 정상에 있어야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허용된 양쪽을 다 자신의 세계로 일치시킬 수 있다. 아브락사스는 그래서 소리로만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도달하면 신처럼 정상에 선다. 당연하게도 “각자를 위한 당연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아브락사스를 추종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브락사스가 되는 일인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자신에게 도달한 개방적 존재다. 고독과 개방이 일치하다니.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인 천직을 성실히 수행하면, 신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눈을 감고,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입맞춤 후에 신은 떠나고 자신만 자신으로 남았다. 신은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진짜로 살아보려는 자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도달한 자라면 그가 신이다. 자신에게 도달한 자가 아브락사스다. 네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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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나에게 없던 것인데
내가 한것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생각지도 않은 어느날
그냥 내게 주어진 선물

깜짝 놀라고
감사하고
생각만으로도
흐믓하기만 한 선물

오늘 하루가
이 파아란 하늘이
선물이 아니면 무엇일까

달려가며
흐믓하게 생각나는 당신이
선물이 아니면 무엇일까


2017년 5월 27일 자전거 타고 퇴근하다 하늘을 보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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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만일 당신이
내 아내가 아니었다면
저런 여자와 사는 남자는
얼마나 좋을까 하여
심술이 나 잠 못 이뤘을 것이요.

만일 네가
내 딸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착하고 예쁜 딸을 둔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 하여
부러워 잠 못 이뤘을 것이네.


2017년 6월 30일 소설 속 “당신이 내 남편이 아니었으면 성인인줄 알았을거야” 구절을 읽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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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어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저기 아름다운 파란 하늘을
영원히 붙들어 매어 놓고 싶어
사진을 찍는다

훗날 바람 불어와 폭풍이 와도
저런 파란 하늘이 있었음을
그리고 다시 있을 것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어느날 충만한 사랑의 마음이
별안간 내게 찾아왔을때
그 마음을 찍어 놓을
사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훗날 바람이 불어와
내 마음이 절망과 권태로 물들어
그냥 여기서 포기하고 싶을때

나에게 그런 사랑이 있었음을
그리고 다시 있을 것임을 잊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다


2017년 9월 4일 자전거로 퇴근하다 하늘이 아름다워 쓰다.

bookmark_border도이야, 안녕

도이야, 안녕

언젠가 그 곳에서
내가 너를 다시 만날때

그때,
가시 세우지 말고
두려워 헤매이고 있을 나를
제일 먼저 반갑게 맞아줄 수 있겠니?

너의 가시가
너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아

나의 가시가
나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너도 알아주길 바래

너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기에

내가 너를 만나는 날까지
나는 나의 챗바퀴를
너처럼 최선을 다해 돌려야겠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까지
도이야 안녕


2017년 9월 8일 고슴도치 도이를 보내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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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하루

지도를 펼쳐 오늘은 여기까지라 찍고
그곳에 다다르면 좋고
아니어도 좋은 하루
그러나, 열심히 분발하는 하루

단지 할일이라곤
궁뎅이를 안장에 얹고
페달만 밟으면 되는 하루
그러나, 어느때보다 풍요로운 하루

잠시 페달을 멈추고
풍경을 즐기고,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 먹는 순간 순간이 좋은 하루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하루

지나다 만나는
더 멋져보이는 곳
더 즐거워 보이는 사람
더 좋아 보이는 목적지
그러나, 눈길 한번 슬쩍 주고 나의 길을 가는 하루


2017년 10월 말 아내와 제주도 자전거 여행 후 쓰다.

여행에서의 하루 하루를 끄집어 댕겨서 오늘 하루 하루로 가져왔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