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진정한 애정이 아닙니다. 위로는 그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케 함으로써 다시 한번 좌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거요.”
…
“퍽퍽한 빵이지만 맛깔난다오.” 그들은 빵냄새를 맡았고, 그는 맛을 보라고 권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느껴졌다.
레이먼드 카버의 <벌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
빼어남보다 장중함을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
옛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鑑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은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고 하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싶다면 계획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다시 계획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몰입하라. 점점 좁히고 거부하라.
쓰고 싶은 책은 잊어라. 지금 쓰고 있는 책만을 생각하라.
언제나 제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등 다른 모든 일들은 그 다음에 하라.
상당히 공감하고 좋은 글이라 옮겨 적습니다. 이러한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공감이 먼저 들고 다음으로 아주 강한 거부감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아 참회하라’는 명령과 함께, 내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을 상기시켜 주고 나를 어떻게 채찍질해야 하는가를 제시합니다. 내가 실패하고 있는 (어렴풋한) 이유를 잘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창작의 비밀’을 쓰고, 프린트하여 책상에 붙여놓고 외우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발견하는 건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헤밍웨이가 하루키가 되지 못하는 좌절을 매번 느낍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하루 한꼭지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이 ‘창작의 비밀’을 우연히 얻게된 소중한 마법서인처럼 천천히 소중하게 읽고, 그것을 다시 바닥에 던져 놓고 제 갈길을 가는것 뿐입니다. 언젠가 용을 만날때 그 마법이 필요하겠지요.
‘감각이 주는 것은 거짓이다. 세계의 진짜 모습은 이성을 통해서 존재를 꿰뚫어 봐야 알 수 있다.’
서양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아이디어.
우사인 볼트의 100미터 기록은 정말일까? : 제논과 멜리소스 : 변화와 운동은 가능한가?
멜리소스의 논증
변화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데, 변화하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변화는 불가능하다.
제논의 역설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역설, 이분법의 역설, 나는 화살의 역설, 기차역의 역설
‘운동이 가능하다’면 이런 모순이 발생하므로 ‘운동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 반론
공간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면 시간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
찰나(1/75초)와 순간 : 찰나는 시간적 길이를 갖지만, 순간은 시간적 길이가 없다. ‘한순간 화살이 정지하므로 운동할 수 없다’는 주장을 비판.
베르그송의 반론
시간은 공간과 달리 더하거나 빼고 나누고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냥 흐르는것이다.
나는 정말로 나인가? : 테세우스의 배 : 변화와 동일성의 문제
마이클젝슨은 여전히 마이클젝슨이다.
테세우스의 배
널빤지를 교체한 1000일 후의 배 A
교체된 널빤지로 만든 배 B
처음배가 A, B배와 동일하다면, A배와 B배는 동일한가?
동일(同一, one and the same) 하다는 것은 하나라는 말인데?
변화와 동일성에 대한 3가지 지속이론
이동지속이론 : 오리지널 배가 A배와 동일하다. 아리스트텔레스
확장지속이론 : A배와 B배 두척이 있다. 테세우스의 배는 변한것이 아니고, 개별자가 일정 시간에 걸쳐서 존재한다. 파르메니데스
찰나지속이론 : 모든 배가 다른 배. 헤라클레이토스
아이슈타인의 등판
확장지속이론의 문제 : 커피의 진짜 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합한 것이라고 했는데, 과거의 뜨거운 커피와 미래의 차가운 커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의 부분일 수 있는가?
상대성이론의 시간지연 현상 :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짐.
뜨거운 커피도 과거 시점의 ‘거기’에 존재하고, 차가운 커피도 미래의 ‘거기’에 존재한다.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두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P.242 P.243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지.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한거지.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거야.
미움받을 용기
나는 과연 변화하고 싶기는 한것인가? 그리고, 내가 변화하려고 애를 쓴다면 변하기는 하는것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기 싫다.’ 이 무슨 개떡같은 생각입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개떡같은 생각으로 4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걸요.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기 싫다’. 이 두 생각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이 두려울 뿐입니다. 동시에 변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을 참아내기 위해 ‘일찍 일어나겠다’는 각오를 되새길 뿐입니다.
더이상 나는 그 ‘불만’을 참아낼 수 없어,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고, 이것 저것 공부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변했나요?
물론입니다. 나는 변했습니다.
나의 변화는 나의 내면에 잠재적 가능성으로 담지되어 여기 저기 나의 생활속에서 생활양식(Life Style)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운동은 관성의 법칙을 갖고 있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다고 나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완료적인 변화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가 변했는지 관찰하고, 자그마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감사하고 물을 주며 키워보려고 합니다.
우주론적 논증 최초의 원동자, 신 : 최초의 도미노를 쓰러트린 신, 부동의 원동자 (The Unmoved Mover), 제1원동자 최초의 원인, 신 : 원인과 결과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 사건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반론 – 꼭 제1원인이 필요한가? -러셀 –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 원인과 결과는 주관적 상상일 뿐이다 – 흄, 당구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 앞에서 겸손하고 두려워 하며, 사랑하고 선하게 살아야 함을 느낍니다. 내가 그것들을 부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