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나는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소망한다.

순간 순간 살아 있어 기쁨에 몸서리 치는
그런 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소망한다.

중독되어 병이 든 하루를
돌아 보지 않아 무의미한 하루를
죽어 있어 의식하지 못하는 하루를 벗어나는 것을 소망한다.

부끄럽고 실망스러워
매일 매일이 괴로운 하루에서 벗어나는 것을 소망한다.

하루 하루 정진하는 나를 소망한다.
예쁜 꽃을 피워내는 나를 소망한다.

bookmark_border내가 만난 꽃

화암사에서 만난 꽃들 – 2023.04.10


무궁화수목원에서 만난 꽃들 – 2023.04.02


회사에 핀, 닭 오줌냄새로 곤충을 쫓는다는 계요등 – 2022.09.07
우아한, 향기도 우아한 옥잠화 – 2022.09.04

bookmark_border시작한다는 것에 대하여

시작한다는 것은
새해 아침 일출을 맞이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하고 순결한 것으로
종교의례를 치르듯 경건한 마음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해가 수면위로 오르기 훨씬 전부터 이미 출발하였으며
시작되었다고 느낄때쯤 이미 중천을 달리고 있어야 합니다.

시작은 새해 아침해가 그렇듯
특별한 것이며 가슴 벅찬 일입니다.

bookmark_border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1997년 가을, 벌초하고 달려간 공주 제일감리교회(현 공주기독교박물관) 문 앞에서 연우누나를 기다리던 내 모습이 너무 생생합니다.

bookmark_border여행의 기술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 정영목 옮김

출발

1. 기대에 대하여

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P.21

2. 여행을 위한 장소에 대하여

보를레르

사실 목적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욕망은 떠나는 것이었다. 그가 결론을 내린대로 ‘어디라도! 어디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 떠나는 것이었다.
P.49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식 식당 (1927년)

동기

3.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플로베르

우리가 뭍에서 본 것은 몰이꾼이 끌고 가는 낙타 한 쌍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두에서 평화롭게 낚시를 하고 있는 아랍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내리자 귀가 멍멍할 정도의 아우성이 들려왔습니다. 흑인 남자, 흑인 여자, 낙타, 터번을 두른 사람과 그 좌우의 처첩들이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건초로 배를 채우는 당나귀처럼 색깔들을 집어 삼켜 배를 가득 채웠습니다.
P.97

암스테르담에서 내가 열광한 것은 그런 경우였다. 그것은 영국에 대한 나의 불만과 관련되어 있었다. 현대성이나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P.102

지도의 어떤 땅덩어리에 빨간색이나 파란색으로 선을 그어 놓고 그것을 다른 땅과 구분하는 조국의 관념, 그런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조국은 내가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즉 내가 꿈을 꾸게 해주는 나라이고, 나를 기분좋게 해주는 나라입니다. 나는 프랑스인인 만큼이나 중국인이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가 아랍인들에게 승리를 거둔 것에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패배로 인해 슬픔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거칠고, 인내심 있고, 완강한 사람들, 최후의 원시인들을 사랑합니다.
P.129

4. 호기심에 대하여

훔볼트

그러나 마드리드에는 모든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측정되어 있었다.

‘보나비아 바실리카는 18세기 이탈리아 바로크의 영향을 받은 교회로, 스페인에서는 보기드문 건물이다. … 내부는 타원형 돔, 서까래가 서로 교차하는 둥근 천장, 미끈한 배내기, 풍부한 치장 벽토로 우아한 모습을 자랑한다.’
훔볼트의 호기심의 수준이 내 수준보다 한참 높았던 것 (그리고 그가 나와는 달리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은 사실을 찾아 나선 여행자는 구경을 하려는 목적을 가진 여행자에 비해서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P.142

내가 알게 되는 모든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 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에 의해서 정당화 되어야 했다. 나의 발견이 나에게 생기를 주어야 했다. 그 발견들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고양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니체는 이 이세이에 「삶을 위한 역사의 용도와 불리한 점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유사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실들을 수집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P.146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사실들을 발견한 탐험가들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의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 놓았다. 이런 구별은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불변의 진리로 굳어져, 마드리드의 중요한 것들은 이미 가치가 확정되어 버렸다. 라 빌라 광장은 별 1개, 팔라시오 레안은 별 2개, 데스칼라스 레알레스 수도원은 별 3개, 오리엔테 광장은 별 없음.
P.148

그는 흥분해서, 4,980미터 이상 올라가면 파리가 발견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기록했다.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물어볼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 준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파리를 보었을 때 약이 올라 파리채를 휘두를 수도 있고 산을 달려 내려가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P.158

훔볼트에게 그런 큰 질문은 “왜 자연이 지역마다 다를까?”하는 것이었다.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 질문은 “왜 사람들은 교회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일 수도 있고, 심지어 “왜 우리는 섬기는 것일까?”일 수도 있다. 이런 소박한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해서 호기심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왜 지역이 달라지면 교회도 달라질까?”, “교회 건축의 주료 양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 “주요 건축가들은 누구였고, 그들은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을까?”하는 질문들을 포괄할 수도 있다.
P.161

풍경

5.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워즈워스

… [자연은] 우리 내부의 정신을 가르치고,
고요함과 아름다움으로 감명을 주고,
또 높은 사색으로 양육하기에,
험한 말이나 경솔한 판단도,
이기적인 사람들의 조롱도,
친절한 마음이 깃들지 않은 인사도,
또한 일상 생활의 온갖 황량한 교제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를 바라보는 모든 것이 축복으로 가득하다는
명랑한 심념을 흐트리지도 못하리라
– 틴턴사원 몇 마일 위에서 지은시

그는 자연 속에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spot)”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 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P.198

숭고함에 대하여

아름다운 풍경은 많다. 봄의 초원, 완만한 골짜기, 떡갈나무, 꽃무리(특히 데이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숭고하지 않다.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념은 종종 혼동된다. 이 두 말은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정반대인 사물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버크는 그렇게 불평했다.

“거세된 수소는 아주 힘이 센 동물이다. 그러나 순진한 동물이며, 매우 쓸모 있고, 전혀 위험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거세된 수소라는 관념은 결코 웅장하지 않다. 거세되지 않은 황소도 힘이 세다. 그러나 그 힘은 종류가 다르다. 매우 파괴적인 경우도 많다…… 따라서 거세되지 않은 황소라는 관념은 위대하다. 따라서 이 관념은 숭고한 묘사에, 감정을 고양하는 비교에 자주 등장한다.”
P.213

예술

7. 눈을 열어 주는 미술에 대하여

빈센트 반 고호 – 사이프러스(1889년)
빈센트 반 고호-별이 빛나는 밤에(1889년)

“이곳의 색깔은 미묘해. 녹색 잎이 선명할때는 선명한 녹색이야. 북부에서는 보기 힘든 녹색이지. 잎이 타들어 가고 먼지가 끼었을때도 풍경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아. 그때는 또 다양한 색조의 황금빛이 깔리기 때문이지. 녹색을 띤 황금빛, 노란색을 띤 황금빛, 분홍색을 띤 황금빛…… 그리고 이 황금빛은 파란색과 결합되는데, 이 파란색은 또 물의 짙은 진보라색으로부터 물망초의 파란색, 코발트색, 특별히 맑고 밝은 파란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채로워.”
P.252

반 고흐는 누이에게 설명했다. “밤은 낮보다 색깔이 훨씬 더 풍부해…… 잘 보면 어떤 별들은 레몬 빛 노란색이고, 어떤 별들은 분홍색, 또 녹색, 파란색, 물망초색으로 빛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내가 굳이 나서지 않는다 해도, 그냥 짙은 남색 표면 위에 하얀 점들만 찍어 놓은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은 분명하잖아.”
P.253

8.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러스킨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인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 없이,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를 묘사하는 것이다.
P.277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연습할 만한 가치를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P.279

나무 한 그루를 그리는 데는 적어도 10분간의 예리한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나무라 해도 행인을 1분 이상 잡아둘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P.280

존 러스킨-공작의 가슴 깃털 스케치(1873년)
존 러스킨-구름들

그 덩어리의 움직임은 엄숙하고, 연속적이고, 불가해하다. 내적인 의지로 살아 움직이는 듯, 아니면 보이지 않는 힘에 강제된 듯 꾸준하게 나아가거나 물러난다.
P.295

저 나무들은 너무도 불편한 자세로 서 있지만 강철같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서, 바위도 그 옆에서는 구부러지고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P.296

귀환

9. 습관에 대하여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팡세] 단장 136
P.304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하찮고 일상적인 경험-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 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질렀으면서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고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비에르 드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른다.
P.318


군산여행을 할 때 이 책을 읽었습니다. ‘여행의 기술’을 읽던 저녁 해질 무렵과 아침 해가 뜨던 옥상의 모습이 선합니다.

‘의미 있는 하루’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던 저녁녘, 그 시간에, 그 하루가, 갑자기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모든 하루는 의미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하루를 인식할 수 있을 때 (그 하루를 인식할 수 있는 공간, 인식할 수 있는 시간에 있을 때) 그 하루는 갑자기 ‘의미있는 하루’가 되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하루를 위하여 저녁 시간 책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책을 읽다 짬을 내어 하루를 돌이켜 보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을 때(나를 불러 줬을 때) 비로소 그 하루가 보이고 의미가 있어집니다.

의미 있는 하루, 의미 있는 여행, 의미 있는 삶.
그것들은 내가 그것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어집니다.
하여, 돌이켜 보고 관찰하고 살펴보고 그것들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bookmark_border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 우종영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얼굴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P.45

느림보라는 별명이 꼭 어울리는 회양목. 그러나 그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동안 회양목은 그 속을 다지고 또 다져서 그 어떤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함을 지닌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조들은 회양목을 가리켜 ‘도장나무’라 불렀다.
– P.100

벌레가 생긴다는건 그 벌레를 잡아줄 새가 주변에 없다는 얘기니까 내가 새를 대신하는 거지.
가지 하나를 떨어뜨릴때도 마찬가지다. 산에 있었더라면 바람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을 가지들을 쳐 내면서, ‘이건, 바람 대신이야’ 하고 되니인다.
– P.106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하고,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한 그 소녀와의 짧은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불현듯 되살아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이 느껴질 때면 그 아련한 그리움은 한층 더 가슴을 파고 든다. 처음이었기에 더 애틋하고 가슴 시렸던 나의 ‘첫’사랑
– P.128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거리……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던진 한마디.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 질 거야.”
– P.217

그해 가을이 다습게 익어가도
우리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에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를 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 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거리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밭 아래를 지켜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 징징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 박노해. <해거리>중에서
– P. 221

아마도 여행길에 한번쯤은 그런 나무들을 본 적이 있을거다. 나무라고 하기엔 모양새가 이상한 그런 나무들 말이다.
그걸 이른바 ‘곡지曲枝’라고 한다.

곡지는 나무가 남긴 투쟁의 흔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겠다는 모진 다짐의 결과물인 것이다.
– P.248

나무에게 땅에 묶여 평생을 사는게 숙명이라면, 뿌리를 내린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은 운명이다.
나무란 놈은 워낙에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주변의 환경에 강하게 맞선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이 땅 어느 생명보다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나무는 결코 자신의 삶에 느슨한 법이 없다.
– P. 249


해거리를 하는 중입니다.

망나니 같은 윗사람들을 볼게 아니라 밭 아래로 얼마나 다져지는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bookmark_border귀를 기울이면

  • 츠키시마 시즈쿠(月島 雫)
  • 아마사와 세이지(天沢 聖司)
  • 문(ムーン)
  • 바론(フンベルト・フォン・ジッキンゲン男爵, Baron Humbert von Gikkingen) 훔베르트 폰 기킹엔 남작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있었다니’ 영화를 보고 느낀 소감이었습니다. 무려 1995년 7월 15일에 개봉된 영화군요(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개봉). 그 시절의 감성이 잘 묻어있었습니다.

좋은 그림을 실컷 본 기분입니다. 불안했던 젊은 날, 조급했던 젊은 날, 꿈 꾸었던 젊은 날이 생각 나 울컥하고 흐믓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bookmark_border음의 고정

  • 레코딩, 음을 고정, (원통형)축음기, 토마스 에디슨
  • 에밀 베를리너, 원반형 축음기, Gramophone
  • 그라모폰
    • EMI (영국)
    • 도이치 그라모폰 (독일)
  • 유니버셜, 워너, 소니
  •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
  • 엔리코 카루소
  • 넬리멜바

소리를 고정하다. 마법 같은 일입니다. 현재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을 붙잡아 고정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고정된, 붙잡힌 소리를 미래에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마법 같은 일이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다보면 음질에 집착하게 됩니다. 각 악기들의 소리를 잘 분리해서 들려주는 스피커, 헤드폰, 코덱들에 집착하게 되고 더 좋은, 더 좋은 음질을 찾아 다닙니다.

그런데, 잊은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레코딩 안에 붙잡혀 있는 시간, 장소,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며 듣는 순간 나는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그 사람 곁에 있는 것 같은 놀라운 순간이 펼쳐집니다. 마법 같은 일입니다.

bookmark_border무제

어둠속의 별은 찾기가 쉽지만, 햇볕아래 별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별을 따라 밤에 계획하고, 낮에 걷습니다. 그 길이 밤에는 분명해 보였으나 낮에는 의심스러우니, 자꾸 나를 다시 어둠속으로 밀어넣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낮에 살고 낮에 걷습니다.

밝은 햇빛 아래 강한 믿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믿음을 지니고, 새로운 ‘명징성의 빛’이 다른 길로 인도할때까지 의심없이 걸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사의 미덕이 ‘의심없는 복종’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