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7-100
K-MOOC : 이유 있는 미술 시간
내가 심고 가꾸어 가는 작은 숲
2025-17-100
K-MOOC : 이유 있는 미술 시간
2025-16-100
반야심경 100번 읽은 것처럼 만들어드림 – 너진똑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것이다”
너와 나가 다르고
지금의 나와 어제의 나가 다르고 미래의 나가 다르다
공은 없다가 아니라
빈칸에 가깝다
원효 대사의 해골물
세상만물이 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빈칸에 아무거나 넣으라는 뜻이 아니다.
무지개 색깔 사이의 경계
흐릿한 스팩트럼이
우리가 봐야하는 공의 이미지에 가깝다
규정하려고 하는 순간 스팩트럼속의 무수한 색을 놓치게 된다.
한가지 단어로 혹은 몇 개의 단어나 문장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더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네, 그렇습니다.
산이 [물] 이라는 얘기는,
물이 [산] 이라는 얘기는,
말장난이나 착시현상이 아니에요.
우리가, [산] 이라 부르고
[물] 이라 부르는 놈은
흐릿한 경계 속에서, 우리 생각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원한 물] 은 [해골 물] 이 되고
[최고의 음식] 은 [최악의 음식] 이 되는 거였어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육신에서 벗어나서
이 모든 것이 [ ] 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상하죠.
개운한 기분도 잠시..
이내 불안과 허무함이 밀려옵니다.
어라?
그때, 산과 물을 바라봤더니
어라, 산은 [산] 으로 보이고,
물은 [물] 로 보이네요.
고민 끝에 우리는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처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이 행까지 다다른 사람은,
때로는 산이 [산] 으로
물이 [물] 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빨주노초파남보] 에
휘둘린다는 사실도 인정하지요.
그렇기에 그는,
무지개를 일곱 색깔로 그리는 사람에게 가서
“너 바보냐? 무지개색이 7개인 거 같아?”
같은 멍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을 알아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산에서 [산] 을 보고,
물에서 [물] 을 보게 되더라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건 당장의 착각일 뿐
진짜 ‘산’과 ‘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압니다.
그 [산] 과, 그 [물] 뒤에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음을 확실하게 알지요.
만약에 말이죠.
부처님이 현대인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부처님은요, 분명..
유튜브 쇼츠도 볼 거고
야밤에 라면도 끓여 먹을 거고
다른 사람과 썸도 탈 거예요.
그건, 분명 인간이 누릴 만한 행복이니까요.
하지만, 부처님은!
유튜브 쇼츠가 아~무리 보고 싶더라도..
할 일이 많으면 안 볼 거예요.
야밤 중에 라면이 아~무리 땡기더라도..
다이어트 중엔 안 먹을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설레더라도..
여친이 있으면 썸을 안 탈 거예요.
부처님은 아무 미련 없이
욕망을 끊어낼 겁니다.
이 모든 충동이 순간적으로는
[행복]이라 느껴질지언정
최종적으로는 ‘고통’에 가깝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이 된 부처님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겁니다.
돈이라는 놈의 본질.
‘재화를 교환하기 위한 약속’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본질을 알기에
[돈이 최고] 같은 바보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영상] 이 좋니, [책] 이 좋니”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겁니다.
그 모든 매체가 ‘그릇’이었다!
는 본질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 ] 입니다.
[ ] 의 철학은
믿음도 아니고, 신념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과 표현에서 벗어나
그 너머의 본질을 포용하는 지혜죠.
[ ] 을 깨달으면,
“I am [부자]예요”
세치 혀로 포장된
거짓말에 속지 않습니다.
[ ] 을 깨달으면,
“쟤는 [원래] 저래”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외모] 가 어떻고, [성별] 은 뭐고
[연봉] 은 얼마고 [학벌] 은 어떻고,
[국적] 이 어디고 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지요.
무엇을 보든, 뭔 말을 듣든, 누구를 만나든
모든 본질이 [ ] 이란 사실을 깨닫는다면..
비로소 보게 되실 겁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너머
흐릿한 경계 사이에서 펼쳐지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색들의,
무수한 일렁임을!
2025-15-100
K-MOOC : 이유 있는 미술 시간
2025-14-100
하나의 선으로 그리기, 펜을 떼지 않고 그리기
2025-12-100
2025-8-100
박완서 1970 동아일보 연재
나(이경), 옥희도, 황태수, 어머니
우연은 우연일 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우연이라는 게 말 그대로 우연히 오긴 하지만 그냥 지나가지 않을 때가 많아서다. 화가 박수근과 소설가 박완서의 인연 역시 그렇다.
1965년 10월, 당시 평범한 주부로 살던 박완서는 박수근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전시회에 갔다가 그의 그림에 붙들렸다. 그가 알고 있던 박수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서울의 미군 PX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였다. 박완서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전쟁이 나면서 점원 생활을 해야 했고, 강원도에서 상경한 박수근도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입에 풀칠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서로의 길을 갔는데, 그동안 박수근은 온갖 어려움에도 자기 길을 꾸준히 간 덕분에 누구나 알아주는 화가가 되었던 것이다.
박수근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박완서는 감동했다. 그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 자기 세계를 이루어냈지 않은가. 5년 뒤, 나이 마흔에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된 ‘나목(裸木)’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소설 후기에서 말했듯, 전쟁의 와중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려고 말이다.
소설 제목을 ‘나목’이라고 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목은 벌거벗은 앙상한 겨울나무를 말하는데, 박수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박수근은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는데, 왜 이런 나무를 많이 그렸을까?
그가 명확하게 밝힌 적은 없지만, ‘나목’이라는 말 자체가 답이 될 듯하다. 나목은 죽은 듯 서 있지만 죽은 나무, 그러니까 고목(枯木)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이겨내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단출한 모습으로 혹독한 시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단칸방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았던, 꿈은 있지만 가난했던 화가는 이런 겨울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다독였을 것이다. 견디고 이겨내면 결국 봄은 온다고 말이다. 당시 나이 마흔이면 살 만큼 살았다고 하던 때에, 소설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박완서 역시 자신이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000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알려줄 날이 머지않았다.
2025-4-100
K-MOOC : 이유 있는 미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