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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100

박완서 1970 동아일보 연재

나(이경), 옥희도, 황태수, 어머니

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서광원의 자연과 삶]〈67〉

우연은 우연일 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우연이라는 게 말 그대로 우연히 오긴 하지만 그냥 지나가지 않을 때가 많아서다. 화가 박수근과 소설가 박완서의 인연 역시 그렇다.

1965년 10월, 당시 평범한 주부로 살던 박완서는 박수근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전시회에 갔다가 그의 그림에 붙들렸다. 그가 알고 있던 박수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서울의 미군 PX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였다. 박완서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전쟁이 나면서 점원 생활을 해야 했고, 강원도에서 상경한 박수근도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입에 풀칠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서로의 길을 갔는데, 그동안 박수근은 온갖 어려움에도 자기 길을 꾸준히 간 덕분에 누구나 알아주는 화가가 되었던 것이다.

박수근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박완서는 감동했다. 그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 자기 세계를 이루어냈지 않은가. 5년 뒤, 나이 마흔에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된 ‘나목(裸木)’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소설 후기에서 말했듯, 전쟁의 와중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려고 말이다.

소설 제목을 ‘나목’이라고 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목은 벌거벗은 앙상한 겨울나무를 말하는데, 박수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박수근은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는데, 왜 이런 나무를 많이 그렸을까?

그가 명확하게 밝힌 적은 없지만, ‘나목’이라는 말 자체가 답이 될 듯하다. 나목은 죽은 듯 서 있지만 죽은 나무, 그러니까 고목(枯木)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이겨내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단출한 모습으로 혹독한 시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단칸방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았던, 꿈은 있지만 가난했던 화가는 이런 겨울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다독였을 것이다. 견디고 이겨내면 결국 봄은 온다고 말이다. 당시 나이 마흔이면 살 만큼 살았다고 하던 때에, 소설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박완서 역시 자신이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000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알려줄 날이 머지않았다.

bookmark_border달과 6펜스

2025-2-100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

  • 찰스 스트릭랜드
  • 에이미 스트릭랜드
  • 더크 스트로브
  • 블랑슈 스트로브
  • 야타
  • 자기의 이유로 살아라
  • 폴 고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것인가?’
‘우리는 온 곳도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는 갈 곳도 없다.’
폴 고갱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인생은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한 일들의 뒤범벅이고 웃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하지만 웃으려니 슬펐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양심이란 인간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이 파티를 보고 있자니, 여주인이 왜 굳이 힘들여 손님을 청하며, 손님들은 왜 굳이 힘들여 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난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네.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

인생에 가치 따위는 없소. 블랑슈 스트루브는 내게 버림받아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마음의 균형이 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거요.

사람은 자기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 된다는 것을 이곳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일을 시도해서 그걸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우리 생활은 소박하고 순진합니다. 야심에 물들 일도 없고,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 봐야 그건 우리 손으로 해낸 일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자부심뿐이고요.

신을 믿는 마음. 그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실패했을 거예요.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 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것일까? 그리고 연 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한 가지 일에 마음을 쏟아 그것을 완성하는 기쁨이란 그렇게 흔히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죽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대체로 자신을 속이는 말이다. 그 말은 아무도 자신의 기벽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또한 기껏해야 자기 이웃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낼 뿐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놓여있다고 생각해요?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없이 주워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오. 그리고 예술가가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여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우리가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인생에 가치 따위는 없소. 블랑슈 스트루브는 내게 버림받아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마음의 균형이 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거요.’.
지금까지 내가 최고의 가치 중 하나라고 믿고 있었던 ‘양심’이 하루 아침에 의심받게 되었습니다.
맹자님이 역설한 그 ‘양심’이 어쩌면 그저 종족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질문은 나를 그 언저리에서 또다시 방황하게 만듭니다.
양심을 따를것인가? 아니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우선은 우물에 빠지려는 아기를 구하고 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