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 8

22. 피라미드의 해체

  • 반구정과 압구정 이야기. (황희와 한명회)
  • 만해와 일해
  • 정도전과 이방원

23. 떨리는 지남철

양명학의 핵심은 ‘심즉리’心卽理입니다. ‘마음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주체성의 선언입니다. 주자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였습니다. 성性이란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心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천명天命, 천성天性, 천리天理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실천이 진리를 담보한다는(만든다는) 주장입니다.

양명학의 3강령은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입니다. P.400

지행합일은 양명학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주자학은 지知와 행行을 선후관계로 놓습니다. 선지先知, 먼저 알고 후행後行, 나중에 행하는 구도입니다. 독서궁리讀書窮理, 즉 책을 읽음으로써 진리를 도달한다는 논리입니다. 양명학에서는 독서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아닙니다. 지知와 행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독서를 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서 삶의 현실 속에서 진리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것을 사상마련事上磨鍊이라고 합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연마해야 합니다. P.401

‘Here and Now’ 그리고 How가 물리 방식의 실사구시라면, ‘Bottom and Tomorrow’와 Why가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양명학과 강화학은 근본을 천착합니다.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입니다.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됩니다. P.403

피 팔기전 찬물을 가득 마신 어려운 가정의 소년 가장 이야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내게는 가책을 받았고 지금도 가책을 받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고집은 반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가족의 끼니를 위해서 병원의 새벽 수도꼭지에서 찬물을 들이키며 그가 감당해야 했던 양심의 가책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양심’이라는 단어를 만날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P.406

‘양심적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낮습니다. 낮을 뿐 아니라 부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며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양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역량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 해야 합니다. P.408

24. 사람의 얼굴

나의 연상세계는 대단히 창백했습니다. 노래의 연상세계와는 달리 내가 구사하는 일상적 개념의 연상 세계는 매우 관념적이었습니다. ‘실업’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경제학 개념이었습니다. ‘빈곤’은 엥겔계수가 연상되었습니다. 메마른 이론과 개념으로 뒷바침되고 있는 생각이란 얼마나 창백한 것인가. 창백한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P.411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 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것처럼. P.418

이 괘의 이름이 박剝입니다.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맨 위의 상효 하나만 양효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언제 음효가 될지 알 수 없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석과불식은 바로 이 마지막 하나 남은 양효의 효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석과불식은 ‘씨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419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찹니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지혜이며 교훈입니다. 이제 이 교훈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소임을 하나씩 집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엽락葉落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잎사귀는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입니다. 엽락이란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불혹不惑과 같은 뜻입니다.

가망 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품을 청산하는 단호함입니다. P.420

다음이 체로體露입니다. 그림에 보듯이 엽락 후의 나무는 나목裸木입니다.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뼈대가 휜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구조와 뼈대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P.421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분糞은 ‘거름’입니다. 분본이란 뿌리(本)를 거름(糞)하는 것입니다. 그림이 보여줍니다. 낙엽이 뿌리를 따뜻하게 덮고 있습니다.

뿌리가 바로 사람이며 사람을 키우는 것이 분본입니다. P.421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 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P.422

수형생활 10년차의 재소자가 자살했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는’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이유였습니다. P.424

독버섯 이야기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P.426

언약은 강물처럼 흐로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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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엘바와 바라나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변소문 꽝 닫는 사람의 경우도 그 행위만으로 단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불가피한 사연이 있으리라는 춘풍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는 자기 자신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생각을 단념해야 합니다. P.326

이 짜장면 사건(?)의 교훈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반성이 있습니다. 나는 직관적 판단을 그것도 재빨리 하고 있었습니다. 수학 문제도 빨리 풀고 상황 판단도 빨리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절대로 빨리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때 굳게 결심했습니다. 절대로 미리 속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한 박자 늦추어 대응하자. 심지어는 나를 지목해서 욕하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나보고 하는거 아니지!” P.328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는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보다 강한 것이어야 하는 강철의 논리로 일관된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모든 나라들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선을 흡수 합병한 메이지明治 일본의 탈아론脫亞論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리에 희생된 나라들 마저도 그러한 논리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논리와 싸워야 할 해방운동마저 그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P.336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 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뜨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P.337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부정적 집합표상集合表象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representation)은 인간의 인식 활동입니다. 우리는 남산을 바라보지 않고도 남산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격리되어 있지만 대상을 재구성하는 인식 능력입니다. 대상은 그에 대한 1개의 표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표상 즉 집합표상으로 구성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고유의 집합 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봉건제의 집합표상이 청산되지 않는 한 프랑스 혁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봉건제의 집합표상은 완고하고 위력적입니다. 귀족.성벽.기사.아름다운 공주와 왕후.화려한 마차 행렬 그리고 귀족들에 얽힌 존경스러운 신화와 공주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는 서민들의 연민도 집합표상을 구성합니다. 참으로 위력적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P.343

프랑스 혁명의 양심 로베스피에르도 혁명 이후의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만큼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고민을 부탁합니다. 여행은 떠남, 만남, 그리고 돌아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자기를 칼같이 떠나는 것입니다. P.345

21. 상품과 자본

그러나 경제학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사용가치가 아닙니다. 쌀의 가치는 일용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른것과 교환될 때의 비율이 가치입니다. P.347

사람 1명 = 구두 1켤레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두 10 켤레로 하면 어떻까요? 그래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구두로 표현하다니. 그러나 구두 10 켤레 대신 ‘연봉 1억’이라면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P.349

근사한 로펌 변호사 부인의 이야기

결론인즉 ‘그 부인의 친정이 굉장히 부자인가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부 관계 역시 등가관계로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인간관계마저도 화폐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천민적 사고입니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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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비극미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인공은 죽을때 말을 많이 하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엑스트라는 금방 죽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P.251

미美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P.252

15. 위악과 위선

교도소 재소자들의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악’僞惡입니다. ‘위선’僞善과는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먹이 있거나 성질이 있어야 한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저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에 맞기도 합니다. P.266

노촌 선생님 말씀은, 야쿠자 방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폭력 투쟁이고 노인 방은 이론 투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폭력 투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승패가 납니다. P.272

16. 관계와 인식

관계와 애정 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이 글의 단초가 된 일본인 기자는 한국 근무 4~5년차의 베테랑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빈번하게 이사하는 까닭은 기마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가를 전전하는 고달픈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P.280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 P.283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인간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입니다. 입장의 동일함을 좁은 의미로 읽지 않기 바랍니다.

지식인은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입니다. P.284

17. 비와 우산

“네가 껌 사는 이유를 내가 얘기할까?”

그가 밝힌 껌을 산 이유는 껌팔이 소년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것이라는 논리였어요.

그러는 너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나는 추호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단호한 답변이었습니다.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쟤는 하루종일 껌 한개도 못 팔겠네.”

“물론 못 팔지! 그러나 세상에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껌팔이가 없는 사회가 되는 거지!”
나눔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결코 무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칼 같은 그의 선언은 역시 젊은 시절의 이념적 언어였습니다. 우선은 껌부터 사는 것이 순서인것입니다. P.295

18. 증오의 대상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평화시장에는 전체 인원 2천 명에 공용 화장실이 3개 밖에 없었습니다. 화장실 앞에서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끊이지 않는 싸움, 그것이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성과 아무 상관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P.303

여름 잠자리의 옆사람과 싸가지 없는 동료 재소자에 대해서 키워 왔던 증오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리고 감옥 속에 않아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기도 하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겨울 독방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증오 역시 그때의 증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반성을 합니다. 증오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 감각에 의해서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랍니다. P.304

그때는 그나마 여름과 겨울이 더위와 추위로 칼같이 나뉘어져서 여름에는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에는 여름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겨울도 춥지 않고, 여름도 그때처럼 덥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서슬 푸르게 벼를 수 있는 계절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것인가가 과제라면 과제입니다. P.305

19. 글씨와 사람

서도에서 더 중요한 것은 환동還童입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합니다. 전 시간에 대교약졸을 소개하면서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 하다고 했습니다. 이 대大라는 것은 최고의 의미이고 노자의 경우 최고의 준거틀은 당연히 자연이라고 했습니다. 기교라는 것은 반자연反自然입니다. 최고의 기교란 졸렬한 듯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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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푸른 보리밭

“신중위님, 나 진짜 살고 싶어요.”

13. 사일이와 공일이

책 제목마저 기억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독서가 독서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실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독서이기 때문입니다. 화분속의 꽃나무나 다름없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실천’이 제거된 구조입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한 발 보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226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최말단에 밀려나 있는 자기의 처지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를 두고도 “사람은 좋은데 사상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먹물들은 연설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점을 극히 경계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 많은 삶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가게 됩니다. 이 과정이 서서히 왕따를 벗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었습니다.

‘톨레랑스’, 프랑스의 자부심이며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기도 합니다. P.229

노인 목수 문도득의 집 그리는 이야기

내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톨레랑스와 관용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노인 목수의 집 그림을 앞에 두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
이것이 톨레랑스의 실상입니다. P.231
(톨레랑스 : 관용의 정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등장. 수십만의 신교도가 목숨을 잃고 자기와 다른 신앙과 사상,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사용.)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근대 사회의 최고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P.231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변화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 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을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35

감쪽같이 숨기고, 대담하게 운반하는 등 막강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동문고 네트워크가 바로 인간적 신뢰입니다. 나는 이것이 자기개조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237

‘떡신자’는 사실 쪽팔리는 별명입니다. 명색이 대학교 선생 하다가 들어와서 떡신자라는 별명이 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문과 이미지가 아마 인간적 신뢰 형성에는 이동문고보다 월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운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사람 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P.239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P.242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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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양복과 재봉틀 – 장자의 반기계론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장자]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이 구절을 만났을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불구자의 자기성찰입니다. 불구자인 산모가 깜깜한 밤중에 혼자서 아기를 낳고 그 무거운 몸으로 급히 불을 켜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비추어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경황없는 중에도 급히 불을 켜서 비추어보는 이유에 있습니다. 급히 불을 켜서 갓난 아기를 비추어 본 까닭은 유공기사기야唯恐其似己也입니다. 그 아기가 혹시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자기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모정입니다. 산모는 자기가 불구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갇혀 있는 문맥 그리고 한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를 성찰하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구의 산모 여지인의 몸짓은 그 통절함이 과연 자기 성찰의 정점입니다. P.152

10. 이웃을 내 몸같이

무감어수無鑑於水, 물에 비추어 보지 마라는 뜻입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면 자기의 인간적 품성이 드러납니다. .. 오나라 부차, 진나라 지백, 아버지, 동생, 친구, 동료… P.155

11.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며. 수주대토

정나라 차치리 이야기. 자기발 본뜨고 시장에 탁을 가지고 가는걸 잊고 다시 돌아갔다 오니 시장은 이미 파했다는 이야기. 영신탁寧信度 무자신無自信,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이론과 현실과) P.171

대비와 관계의 조직

좌.우 / 상부.토대 / 인>과, 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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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화동和同 담론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79

6.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정치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의 세가지라고 대답합니다.
부득이 없애야 한다면? 兵 > 食 > 信 순으로
그러나, 관중이라면 信 > 兵 > 食 P.92

다산의 [목민심서]도 그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탕에는 백성을 기른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식食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삼고 민民의 욕망과 정서를 승인하는 것이 반드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중의 패권논리는 역사적으로 현실 적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P.92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직접민주제가 실현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대의제代議制입니다. 대의제는 중간계급을 승인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이 실은 민民보다 인人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경연처럼 최고 권력까지 규제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치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입니다. 예외없이 이러한 계급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가 장수하는 역설적 이유입니다. P.96

“군자도 궁할때가 있습니까?”
자로의 노여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의외로 조용하고 간단합니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이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 P.102

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16

봉생마중 불부이직 (蓬生麻中不扶而直) – 순자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P.119

8. 잠들지 않는 강물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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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랑하는 예술가

엄마와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 -> 닮았겠구나. 곧 커서 엄마가 되겠구나.

현실을 현실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分하고 석析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해 버립니다. 사과를 쪼개면 그래도 쪼개진 각각의 조각이 여전히 사과입니다. 만약 사람이나 토끼를 쪼갠다고 하면 그 쪼개진 조각을 여전히 사람이나 토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비약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상화, 타자화 하게 되면 이미 우리의 세계가 아닌것이 됩니다. 주체와 분절된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대상과 분절된 주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관념적으로만 가능하고 실험실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의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P.4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 장기수 할아버지
좌경적 이론 :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
우경적 실천 :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 P.43 P.44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체게바라 P.45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P.52

귀곡자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사의 배치가 전투력을 좌우하듯이, 언어의 배치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닉rhetoric(미사여구)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서 ‘說’자는 ‘설’說 자로 쓰고 뜻은 ‘열’悅(기쁠열)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言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틑 레토닉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P.54

상대방을 설특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것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P.55

4. 손때 묻은 그릇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체,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 하여 다른것과의 관계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가지의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 ‘겸손’입니다.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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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책커버
  • 저자 : 신영복
  • 출판 : 돌베게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1. 가장 먼 여행

나는 20년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p.14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 지식은 지식이라기 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P.15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 인식과 성찰이 공부입니다. P.18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도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고생 그 자체입니다. P.18

<머리-가슴-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P.19

2. 사실과 진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쉬르의 언어구조학이 그것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합니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4

영상서사 양식 vs. ‘바다’ 단어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인식이란 양적인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악의 상상력,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을 소중히 계승하되 이것이 갖고 있는 결정적 장단점을 유연하게 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P.29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 중영복 선생님의 강연 中

엽서를 읽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사람들은 그걸 10분 짜리로 착각해요. 나는 그걸 한달 동안 머릿속에서 교정을 반복하며 써요.

누구든 한달을 쓰면 그 만큼 써요.

지식의 지도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매일 보고 고치고 해요.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요.

유법불가 무법불가 有法不可 無法不可
법은 오래된 미래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해요. 그러나 법에 틀에 규칙에 갖혀서는 안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