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인생의 성공.
제법 오래 살아본 사람의 식견과 안목으로 볼 때는 아무래도 노년의 삶이 가장 중요하지 싶다.
날마다 이 세상 첫날처럼 살고
날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면서 살자.
소년이여 조금만 꿈을 가져라.
꿈을 가지되 실현 가능성이 분명하고 목표가 확실한 꿈은 가져라.
그리고, 끝내 그 꿈을 이뤄라.
이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내 인생을 걸고 하는 말이다.
“하나 없다” 이는 임강빈 선생 생애의 마지막 한탄이지만 모두의 한탄이 될 수도 있다.
빈이무첨 부이무교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한지 않는다.’
서서히 끓는 물에 죽는 개구리.
우리가 사는 모습을 여기에 비겨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무감각증 문제다. 내 가치관이 따라 세상을 보면서 사는게 아니라 타인의 가치관에 따라 세상을 보면서 사는게 문제다. 그렇다. 우리 인간이 개구리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이제 회갑을 넘긴 사람이 되었네. 이제부터는 내가 헛소리를 할지도 모르니 내 말을 곧 듣지 말게.” 시인 김현승.
시대가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시대를 만드는 것일까?
이쯤에서 생각해본다. 거리두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회적 거리두기 뿐만 아니라 세상살이 전반에 걸쳐 필요한 것에 아닐까 ? 나만해도 그동안 세상과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왔다. 세상일 하나하나에 시시콜콜 관심을 갖고 거기서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나 싶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거리두가는 자신의 삶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인간은 너나없이 자신의 일에는 무관심할 수 없다. 이는 하나의 본성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에도 거리두기를 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자기자신을 객관적 입장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문제다. 오랫동한 마음을 모아 연습해야만 그 가능성이 조금씩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 죽은 물고기는 아니어야 한다. 그러려면 부단히 헤엄쳐 상류로 올라가야 한다. 제자리 멈춰서기만 하려 해도 물의 흐름 만큼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 말 대신 ‘타인인지 감수성’ 이란 말을 새로 만들어 쓰고 싶다.
행복을 유예하지 말자.
예쁜 말을 하면서 살 일이다. 좋은 말을 하면서 살 일이다. 남을 위하는 말을 하면서 살 일이다. 그럴때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나고 남에게도 좋은 일에 일어나고 세상일도 조금씩 좋은 쪽으로 풀릴 게다.
네 말대로 되리라.
좋은 말이지만 무서운 말에기도 하다.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두방은 없다 > – 비스라바 쉼바르스카.
두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없다.
시를 오래 써온 나는 가끔 후배 시인들에게 ‘무엇 무엇에 대해’ 쓰지 말고 ‘바로 그것’을 쓰고, 나아가 ‘바로 그것이 되도록’ 쓰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바깥 풍경만 보고 하는 생각이 아닐까. 인생을 건성으로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어떤 인생, 그 누구의 인생도 가볍지 않다.
진지하지 않은 인생은 없고 아름답지 않은 인생은 없다.
남의 일생만 올려다 볼 일에 아니다.
그런 걸치레 인생, 가짜 인생에 속을 게 아니고 또 속지 말 일이다.
어디까지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지루하고 따분하게만 보이는 나의 하루가
나의 생각
실은 그 속에서 치열한 하루였다.
나의 하루는 결코 가볍거나 하찮치 않으며, 순간 순간 치열하게 발견하고 애쓰는 하루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세 가지는 또 어떤가?
첫째가 지금 여기,
둘째가 옆에 있는 사람.
셋째가 그 사람에 잘 하는 것.
이 얼마나 단순 명쾌하면서도 놀랍도록 소중한 지혜인가?
나는 결코 시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끝없이 잘 쓰고 싶어하고 끝없이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