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 사는 것이 여행만 같기를
오늘 하루 설레임에
이른 새벽 두 눈이 번쩍 떠 지기를
아깝기만 한 시간 낭비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를
높은 산 오르는 다리의 무거움이
풍광과 함께 묻히기를
계획할때 걷지 않고
걸으며 계획하지 않아
그 곳에 풍덩 뛰어 들어 하나가 되기를
그리하여 이 모든 순간 순간이
하나 하나 작품이 되어
다시 돌아감에 하나 아쉬움이 없기를
2015년 새해맞이 제주여행중에 쓰다.
내가 심고 가꾸어 가는 작은 숲
나의 이야기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여행만 같기를
오늘 하루 설레임에
이른 새벽 두 눈이 번쩍 떠 지기를
아깝기만 한 시간 낭비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를
높은 산 오르는 다리의 무거움이
풍광과 함께 묻히기를
계획할때 걷지 않고
걸으며 계획하지 않아
그 곳에 풍덩 뛰어 들어 하나가 되기를
그리하여 이 모든 순간 순간이
하나 하나 작품이 되어
다시 돌아감에 하나 아쉬움이 없기를
2015년 새해맞이 제주여행중에 쓰다.
미움받을 용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전경아 옮김
신영복
‘위로’는 진정한 애정이 아닙니다. 위로는 그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케 함으로써 다시 한번 좌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거요.”
…
“퍽퍽한 빵이지만 맛깔난다오.” 그들은 빵냄새를 맡았고, 그는 맛을 보라고 권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느껴졌다.
레이먼드 카버의 <벌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
빼어남보다 장중함을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
옛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鑑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은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고 하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상당히 공감하고 좋은 글이라 옮겨 적습니다. 이러한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공감이 먼저 들고 다음으로 아주 강한 거부감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아 참회하라’는 명령과 함께, 내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을 상기시켜 주고 나를 어떻게 채찍질해야 하는가를 제시합니다. 내가 실패하고 있는 (어렴풋한) 이유를 잘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창작의 비밀’을 쓰고, 프린트하여 책상에 붙여놓고 외우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발견하는 건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내가 헤밍웨이가 하루키가 되지 못하는 좌절을 매번 느낍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하루 한꼭지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이 ‘창작의 비밀’을 우연히 얻게된 소중한 마법서인처럼 천천히 소중하게 읽고, 그것을 다시 바닥에 던져 놓고 제 갈길을 가는것 뿐입니다. 언젠가 용을 만날때 그 마법이 필요하겠지요.
그 끝없이 밀려드는 두려움
두려울수록 움틀거리는 내 안의 뜨거움
그리고, 엔진의 매스꺼움
나는 이순신을 꿈꾼다
그때 나는 아주 보잘것 없는 빡빡이 이병이었고, 모든게 겁이 나던 어린아이였습니다.
거대한 자연을 만났을때, 이 보잘것 없는 인간이 그것을 마주하고 섰을때, 그리고 내가 그것을 극복하고 있다는것을 느낄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마음속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덤벼라’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크고, 위대했던 순간이었던것 같습니다.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신영복의 담론
…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두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P.242 P.243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지.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지.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한거지.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거야.
미움받을 용기
나는 과연 변화하고 싶기는 한것인가?
그리고, 내가 변화하려고 애를 쓴다면 변하기는 하는것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기 싫다.’
이 무슨 개떡같은 생각입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개떡같은 생각으로 4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걸요.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기 싫다’. 이 두 생각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이 두려울 뿐입니다. 동시에 변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을 참아내기 위해 ‘일찍 일어나겠다’는 각오를 되새길 뿐입니다.
더이상 나는 그 ‘불만’을 참아낼 수 없어,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고, 이것 저것 공부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변했나요?
물론입니다. 나는 변했습니다.
나의 변화는 나의 내면에 잠재적 가능성으로 담지되어 여기 저기 나의 생활속에서 생활양식(Life Style)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운동은 관성의 법칙을 갖고 있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다고 나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완료적인 변화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가 변했는지 관찰하고, 자그마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감사하고 물을 주며 키워보려고 합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 앞에서 겸손하고 두려워 하며, 사랑하고 선하게 살아야 함을 느낍니다. 내가 그것들을 부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복음 5:3
우리는 항상 답을 찾으려 애쓰는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것은 질문인데 말이죠.
그래서 항상 질문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오래도록’은 얼마만큼인가?
‘최선’은 어디까지인가?
‘잘’ 은 어느정도인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 잘 보냈는가?
오늘 무엇을 했다면 나는 잘 보냈다고 할 수 있는가?
나에게 질문하고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늦은게 아니라 마음이 늦은 것입니다. 실력이 모라란게 아니라 마음이 모자란 것입니다. 내가 아마추어에 머무는 이유는 마음 또한 아마추어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대할때 프로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조금 더디 갈뿐 대충 가지 않는 것입니다. 보다 꼼꼼하게 천천히 해 내는 것입니다. 시간은 누구든 그만큼 하면 더 잘할 수 있게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울림이 다시 떠오릅니다.
엽서를 읽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사람들은 그걸 10분 짜리로 착각해요. 나는 그걸 한달 동안 머릿속에서 교정을 반복하며 써요.
…
누구든 한달을 쓰면 그 만큼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