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셧업앤댄스

“원준아,
에어로빅은 어때?
재밌어?”

“아니 재미없어
근데 할거야” – 64화

“사실… 에어로빅은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고
좀 창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멋지게 최선을 다하는거야!” – 마지막 파이팅을 외치면서. 65화

“너는 고된 인생을 살지도 모르겠다.
상처받아 좌절할 일도 있겠지.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춤추는 거야.”
– 가네시로 가즈키 (이교도들의 춤中) 66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던 셧업앤댄스 웹툰이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청소년기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입니다. 가볍던 이야기가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꿈에 대한 이야기이고 연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꿈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되고, 지금 나의 꿈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 꿈을 진짜로 사랑하는가?
내가 정말로 그 꿈을 좋아했던가?
그런데, 나는 왜 지금 웃고 있지 않은가?

춤을 춥니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인것처럼 춤을 춥니다.
그냥 춥니다. 끝까지 춤을 추는 겁니다.

묻고 의심하고 의식하는 순간 나의 춤은 흩어지고 무너집니다. 끝까지 춤을 춥니다. 춤판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춤판이 기다립니다. 그 춤이 잘못된 춤이라면 더 좋습니다. 그 끝에 더 좋은 춤판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추고 있는 춤의 순간 순간에 집중할 뿐입니다. 동작 하나하나에 말이죠.

아이들 하나 하나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들은 다른이가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하나 하나 문제를 풀어갑니다.
함께 가면 됩니다. 옆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됩니다. 그 문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스로 그 문제들을 대면하며 풀어가면 됩니다.
그러니 나는 그 옆에서 (그와 연대하며) 나의 일을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에어로빅을 함께 배우고, 함께 콜라를 나눠마시며 함께 웃고 떠들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문제들은 하나 하나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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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화동和同 담론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79

6.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정치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의 세가지라고 대답합니다.
부득이 없애야 한다면? 兵 > 食 > 信 순으로
그러나, 관중이라면 信 > 兵 > 食 P.92

다산의 [목민심서]도 그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탕에는 백성을 기른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식食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삼고 민民의 욕망과 정서를 승인하는 것이 반드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중의 패권논리는 역사적으로 현실 적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P.92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직접민주제가 실현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대의제代議制입니다. 대의제는 중간계급을 승인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이 실은 민民보다 인人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경연처럼 최고 권력까지 규제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치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입니다. 예외없이 이러한 계급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가 장수하는 역설적 이유입니다. P.96

“군자도 궁할때가 있습니까?”
자로의 노여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의외로 조용하고 간단합니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이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 P.102

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16

봉생마중 불부이직 (蓬生麻中不扶而直) – 순자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P.119

8. 잠들지 않는 강물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P.123

bookmark_border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 2

3. 방랑하는 예술가

엄마와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 -> 닮았겠구나. 곧 커서 엄마가 되겠구나.

현실을 현실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分하고 석析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해 버립니다. 사과를 쪼개면 그래도 쪼개진 각각의 조각이 여전히 사과입니다. 만약 사람이나 토끼를 쪼갠다고 하면 그 쪼개진 조각을 여전히 사람이나 토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비약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상화, 타자화 하게 되면 이미 우리의 세계가 아닌것이 됩니다. 주체와 분절된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대상과 분절된 주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관념적으로만 가능하고 실험실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의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P.4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 장기수 할아버지
좌경적 이론 :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
우경적 실천 :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 P.43 P.44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체게바라 P.45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P.52

귀곡자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사의 배치가 전투력을 좌우하듯이, 언어의 배치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닉rhetoric(미사여구)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서 ‘說’자는 ‘설’說 자로 쓰고 뜻은 ‘열’悅(기쁠열)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言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틑 레토닉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P.54

상대방을 설특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것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P.55

4. 손때 묻은 그릇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체,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 하여 다른것과의 관계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가지의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 ‘겸손’입니다.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2

bookmark_border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 1

담론책커버
  • 저자 : 신영복
  • 출판 : 돌베게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1. 가장 먼 여행

나는 20년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p.14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 지식은 지식이라기 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P.15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 인식과 성찰이 공부입니다. P.18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도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고생 그 자체입니다. P.18

<머리-가슴-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P.19

2. 사실과 진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쉬르의 언어구조학이 그것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합니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4

영상서사 양식 vs. ‘바다’ 단어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인식이란 양적인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악의 상상력,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을 소중히 계승하되 이것이 갖고 있는 결정적 장단점을 유연하게 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P.29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 중영복 선생님의 강연 中

엽서를 읽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사람들은 그걸 10분 짜리로 착각해요. 나는 그걸 한달 동안 머릿속에서 교정을 반복하며 써요.

누구든 한달을 쓰면 그 만큼 써요.

지식의 지도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매일 보고 고치고 해요.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요.

유법불가 무법불가 有法不可 無法不可
법은 오래된 미래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해요. 그러나 법에 틀에 규칙에 갖혀서는 안돼요.

bookmark_border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최진석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이보다 더 빛나는 한 줄이 또 있을까? 구도자들은 신을 향해 걷는 방식으로 포장해서 사실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고독한 구도자를 닮는다. 구도자들이 보통의 삶을 끊은 채, 자신이 걸어야 할 궤도를 스스로 짠 후, 일부러 거기에만 맞춰 돌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마저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고백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멀어진다는 건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부분은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의 문을 열지도 않는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에는 쉽고도 강하게 빠지면서,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따르는 일은 왜 그리 어려워하는가. 여기서 쉽고 어려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밖에서 오는 ‘바람직함’은 쉽게 알 뿐만 아니라 확신의 힘으로 날렵하게 따르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오는 ‘바라는 것’은 알기도 어렵거니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는 너무 두렵다.

‘바람직함’은 밖에 이미 정해져 있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지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대등한 문법까지도 이미 펼쳐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만 하면 된다. 숙고하거나 사유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신은 심지어 자신에게마저도 비밀스럽다. 자신을 알려면 사유하고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 게으른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밖에서 주어진 것을 살기는 쉽고,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살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에서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겨진 자신을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이 제 자리를 잡는다.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를 살리지 못한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자신은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호기심으로 열린 그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생각이라고도 하고 사유라고도 한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사유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자신을 그 틈새에 끼워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익숙함과 믿음에 균열이 가면서 자신이 열려가는 과정을 “데미안에 의해 눈뜨게 된 사유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어렵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쉽다.

진짜 인간은 세계를 지니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유하여 알려고 한다. “내면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반대로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최초로 번쩍 빛나는 순간, 그는 바로 인간이 된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알려고 하는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당사자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편안하고 안락한 것들에 심한 균열이 가는 것을 경험한다. 회개이자 참회일 수도 있다.

싱클레어의 균열은 거짓말로 시작된다. 거짓말은 가끔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려는 태도인데,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싱클레어는 우선 익숙한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자기 자신 이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자는 멈춰 있는 정해진 자신을 우선 거짓된 존재로 조작해서 거기에 금을 내고 쪼갤 준비를 해야 한다.

‘거짓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 이상으로 넘어가는 도전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싱클레어는 밝고 환하며 기품 있던 세상에서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어둡고 칙칙한 세상과 인연을 맺는다. 모든 새로운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려움 속에서 싱클레어는 어둠을 이미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가족들은 여전히” 밝고 환한 곳에서 멈춰선 채 싱클레어를 “애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밝고 환한 세상의 중심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다. 거짓말을 매개로 “다른 세계”로 추락한 싱클레어는 마침내 “죄를 짓고 불행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영원히 품을 수 없는 세계를 싱클레어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탈하여 이제 싱클레어는 그런 사람들과 투쟁하는 방황을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태어난 세계로는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뿌리를 내려가는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은 평화롭고 밝은 자기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생경해 보이는 풍경이다. 어두운 “다른 세계”와 밝고 익숙한 세계 사이에 끼면 이 생경함의 엄습을 피할 수 없지만, 생경함은 어떤 방도로도 해석할 수 없어 신비의 꿈결 같기도 하다.

방황은 종종 방탕을 낳기도 하니, “방탕한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살기 위한 최상의 준비 활동”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그냥 방탕에 빠진 싱클레어를 가볍게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클레어의 방황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세계에 낀 자의 사명은 방황과 방탕 속에서도 양쪽 세계를 품어야 하는 운명으로 진화하는 일이다.

이 진화를 먼저 해낸 데미안의 모습을 보라. 데미안은 언제나 “자신만의 법칙대로 사는 듯 진귀하고 고독하고 조용하게 걷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걷는 자는 사이에 낀 채 혹은 양쪽을 품은 채 고독하다.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고독한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有)의 세계와 ‘무’(無)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품어야 ‘도’(道)라고 말하는 노자는 아브락사스의 중국판이다. ‘유’와 ‘무’를 동시에 품은 노자도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했다. 양쪽을 품은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인위적 절반에 갇혀 폐쇄적인 자는 사랑을 학습하거나 거래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존재와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고 싱클레어가 “이제 홀로 있을 수 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말 한 것은 자신을 향해 걸었던 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여 문득문득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는 뜻이겠다.

사랑은 고독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자신으로 돌아간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왕국인 것이다. 사랑은 도덕과 무관하다. 도덕은 한 쪽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칼끝이 조금이라도 향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음악을 닮았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도달하여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든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을 닮았다.

신은 고독의 정상에 있다. 정상에 있어야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허용된 양쪽을 다 자신의 세계로 일치시킬 수 있다. 아브락사스는 그래서 소리로만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도달하면 신처럼 정상에 선다. 당연하게도 “각자를 위한 당연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아브락사스를 추종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브락사스가 되는 일인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자신에게 도달한 개방적 존재다. 고독과 개방이 일치하다니.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인 천직을 성실히 수행하면, 신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눈을 감고,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입맞춤 후에 신은 떠나고 자신만 자신으로 남았다. 신은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진짜로 살아보려는 자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도달한 자라면 그가 신이다. 자신에게 도달한 자가 아브락사스다. 네가 신이다.

bookmark_border자기 앞의 生

La Vie devant Soi

  • 저자 : 에밀 아자르 (로맹가리)
  • 역자 : 용경식
  • 출판사 : 문학동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p.13

“난 뭘 하기에 너무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아줌마.” p.259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p.268

사랑해야 한다. p.311


로쟈와 함께 문학속의 인생1

  •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 자전적. 자전문학
  • 로맹가리 (1914 ~ 1980)
    에밀 아자르
    예순 여섯에 권총자살 (1980)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두번의 콩쿠르상
    (3대 문학상 : 노벨문학상, 부커상(영국), 콩쿠르상(프랑스))
  • <새벽의 약속>
    이혼할 무렵
    어머니와의 관계 정산. 15년간의 애도. 상실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
    이후 진세벅 (보호할 여자). 79년 의문사. 약물. 자살?. FBI 관련. 보호 못한 책임
  • <자기 앞의 생>
    아들 디에고
    스페인 가정부 (로자 아줌마 모델)
    “디에고가 어떻게 읽었을까?”
    아들을 위한 작품.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것
    모모의 아버지. 죽음으로 대신.
    예술가로서의 삶 vs. 어이없는 죽음.
    잘 죽어야 함.
  •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小예술론 : 예술과 삶은 별개. 예술은 트릭
    大예술론 : 삶 전체가 예술과 등가. 인생문학. 다자이오사모(일본작가)
    꾸며낸 이야기가 감동을 주기는 참으로 어렵다.
  • 가족 소설. 확대 가족 소설
    사랑해야 한다.
    모모-로자 아줌마 처럼
    거래. 우연한 가족 -> 확대 가족. 혼외(혈연외) 가족
    좀도둑 가족 (칸느 수상작), 원제 : Shoplifters, 어느 가족 (한국)
    가족의 의미
    혈연 가족이 갖는 배타성
    가족 실험. 공동체 실험과는 다름.
    프랑스. 유대인. 회교도
    <이상한 정상가족> – 김희경
    정상 : 다분히 폭력적인 언어
    아버지가 왜 안계시니?
    다문화. 편모
    우리는 가족 내에서도 차별 (서자)
    <인간의 운명> – 솔로호프
  • 자기 앞의 생 (여생)
    디에고에게
    다 죽고 다 잃은게 아니다.
    ‘사랑’이 있다.
    그러면, 살아 갈 수 있다.

bookmark_border카프카의 <변신>

  • 저자 : 프란츠 카프카
  • 역자 : 전영애
  • 출판사 : 민음사

로쟈와 함께 문학 속의 철학 읽기2

  • 카프카의 <변신>- 변신의 의미와 한계
  • 20세기 문학의 대표작
    – 카프카의 문학 행위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 체코인. 독일어로 씀. 동화된 유대인
    – 문학 자체가 사적
  • 카프카
    – 1883 ~ 1924
    – 아버지 : 자수성가. 성공한 유대인, 단단한 체구. 프라하. 상류층(7%)을 위해 독일학교에 보냄. 프라하의 상류층.독일인. 유대인은 낮은층.
    – 남동생 둘은 일찍 사망. 여동생 셋은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
    – 부모의 기대. 원망하지는 않음.
    – 하루키가 비슷. 해변의 카프카
    – Kafka : 자모자자모음. Samsa : 잠자. Bende. 자신의 분신들
  • 막스 브로토(친구)가 유언 집행
    – 1912. 변신
    – 1914. 소송
    – 1922. 성
  • 부자 관계를 다루고 해결하고 싶었던…
    – 글쓰고 싶은 자신의 욕구 vs. 아버지의 기대
    – 어느 한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음.
    – 선고(판결) – 게오르크 반데만.
    러시아 친구(예술가) vs. 게오르크(시민)
    아버지 : 더 아들 같은 vs. 익사형을 선고
    시민과 글쓰기
    양립 가능한것 같지 않아 파혼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건의 책 분량. 항의. 아버지를 화나게 하지는 않음(어머니에게 보냄)
  • 변신
    – 벌레
    카프카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독자만 알아듣는
    – 그레고지 잠자
    외판원. 아들. 오빠 -> 나중에 ‘그것’이 됨 (벌레) -> 식음전폐. 스스로 죽음 -> 가족의 행복을 기대.
  •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였지만 부모를 사랑. 복종.
    – 어린 기억. 어린 카프카 물마시러 ‘똑똑’
    – 무죄 vs. 유죄
    – 둘은 해소되지 않고 끝까지 유리.
  • 시민사회에서 예술가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부조리

문학에 대한 비평과 해설은 내가 느끼고 감동받았던 부분, 그것이 비록 무지와 오해, 과장과 확대해석속에서 받았던 감동일지라도 그 사랑(감동)을 일정부분 훼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강의였습니다.

처음 카프카의 변신을 접하고서 나는 몇 주 같은 생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거 뭐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지? 벌레가 되었다 죽은 이야기는 뭐지? 뭘까?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같은 생각을 하며 산책길을 거닐다 나는 한참을 얼어붙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벌레가 되어 있다면?’
그러면 장차 나에게 일어날 일들을 빤히 보여주고 있었으며,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처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변치 않는 존재인것 마냥 살고 있지만, 나는 어느날 이 가족들 사이에 ‘뚝’ 떨어져서 나의 역할과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상태와 나의 역할이 깨어졌을때, 나의 아내와 나의 딸, 나의 아버지는 나를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아니, 그전에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나는 나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의미. 내 삶의 의미 따위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그저 그 사이에 ‘뚝’ 떨어졌을 뿐입니다. 그러하니, 나는 내 존재의 의미, 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온전하게 존재할때 나와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하니, 나는 나를 누구보다 더욱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니, 나는 다른이들을 힘껏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카프카의 변신 – 2

bookmark_border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일리치의죽음-열린책들
  • 저자 : 레프 톨스토이
  • 역자 : 석영중, 정지원
  • 출판사 : 열린책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직한 것이었다. p.26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거야. 그래, 그랬었던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 만큼씩 삶은 내 발 아래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 그래, 다 끝났어 죽는것만 남았어. p.110

<어쩌면 내가 잘 못 살아온건 아닐까?> p.110

<만약에, 의식적으로 살아온 내 평생의 삶이 정말로 <<그게 아닌 삶>>이었다면 어떡하지?>

<만약에,> 그는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의식만 지닌채, 바로 잡을 겨를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그는 똑바로 누워 지나간 삶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되집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하인에 이어 아내와 딸, 그리고 의사가 차례로 보여준 행동과 말은 모두 간밤에 그가 깨달은 무서운 진실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온 삶 전체가 <그게 아닌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든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려버리는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p.118

죽음이 끔직한 줄 알았는데,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끔찍한 것은 죽어가는 삶이었다. p.139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였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짜 기쁨은 빈트 게임이었다. p.192

회사를 다니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었고, 모임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면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진짜 기쁨은 유튜브와 쇼핑 그리고 게임이었다.

소설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그(게라심)는 진짜 기쁨, <찬란한 삶의 기쁨>을 향유한다. p.195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다른이들과 다른)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 삶은 <그게 아닌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P.198

<그것>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래서는 안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도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아들이 불쌍했다.
이 대목에서 똘스또이가 사용하는 동사, 즉 보다, 듣다, 느끼다는 모두 감각과 관련된 동사이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각성으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똘스또이에게 깊이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깊이 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행위이다. 바라봄의 윤리적 의미는 아내와의 대면에서 극대화된다.
아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헤벌린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그녀의 코와 빰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 내렸다. 아내도 안쓰러웠다.
그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진심으로 바라본 적 없는 아내를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본다. 아내도 그를 본다.

시선의 교환이 연민의 교감으로 전이되고 연민의 교감은 최종적인 화해, 즉 주변 사람들과의 화해, 세계와의 화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자신과의 화해로 이어진다. 결국 그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그것>은 연민, 화해, 용서, 그리고 그 모든것들을 포괄하는 사랑이었다. p.199

그는 아들의 눈물을 보았고 아들의 손길을 느꼈고 아내의 절망을 보았고 그들을 용서했고 그들에게 용서를 청했다. 이게 다다. 그는 해방된다. p.201

그러자 갑자기 모든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방향, 열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 자신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p.201

단순하고 평범한 삶은 끔찍한 것인가? 아니면 좋은 것인가?
단순하지만 상실되었던 <그것>. 진심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고, 아파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갖고 사는것이다. 이 역시 삶의 방식, Life Style의 문제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수가!」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일어났고 그 순간의 의미는 이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p.203

이 기쁨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반이 투병 생활중에 돌이켜 보았던 그 모든 가짜 기쁨들, 유족과 동료들이 복제하는 <기쁨의 느낌>들, 그런 것들이 아닌 진짜 기쁨. 이것이 삶이다. p.204


로쟈와 함께 문학 속의 철학 읽기2

  •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이란 무엇인가
  • 이반 일리치의 죽음. 1886
  • 안나 카레리나 1877
  • 참회록 1882
  • 전쟁과 평화 1869(41세)
    일상성. 삶을 긍정.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행. 안드레이, 피에르, 나타샤.
  • 안나 카레리나 : 죽음으로 중심추가 이동. 이후 소설을 부정. 소설을 떠남
  • 인생과 죽음은 같다는 생각. 거대한 기만이라는 생각. 에술과 가정도 기만.
  • <죽음과 죽어감> –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말기암 환자의 5단계 변화
    죽어감을 단적으로 잘 보여줌.
    죽음 극복에 대한 아이디어
  • 죽음은 모든것을 무효로
  • 정말 나는 죽는 걸까?
    사람은 죽는다.
    케사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케사르는 죽는다.
    그러나, 나는 케사르가 아니지 않은가?
  • 다양성 확보 : 오류 발생 -> 기계(유적적 운반체) 교체 -> 다음 세대에 유전적 정보 전달 (생의 목적)
  • 죽음 : 미래의 사건
    죽음 의식 : 미리 앞당겨 의식. 시간의식의 하위 범주.
    100년 뒤를 의식? -> 적당한 수준에서 차단 : 무의식적 방어기재. 진화과정서 발명됨. Blind 쳐줌 ==> ‘죽음’을 의식하지 않음.
  • 죽음을 의식하면 어떤것도 의미 없게 됨 -> 블라인드 작동 : 본능적인 차단. 거대한 기만.
  • 톨스토이에게 죽음의 공포가 기습. 모든것을 무력하게. 공황장애
  • 상실 -> 우울증 : 기간이 없음. 현실 부정. 본능 고장
    상실 -> 애도 : 타이머 작동(3~12개월). 회복.
  • <하지무라트> : 톨스토이의 분신적 인물.
    샤밀. 러시아에 맞서 국가를 세우려 함. 잠재적 도전자 -> 러시아 투항 -> 가족교환 요구 -> 다시 도망 -> 죽음.
    ==> 끈질긴 생명력 예찬. 바퀴에 깔린 엉겅퀴풀.
    맥베스 : 끝까지 자기 운명에 맞섬.
    호 = 죽음 이 기쁨은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반이 투병 생활중에 돌이켜 보았던 그 모든 가짜 기쁨들, 유족과 동료들이 복제하는 <기쁨의 느낌>들, 그런 것들이 아닌 진짜 기쁨. 이것이 삶이다. p.204

어떻게 살 것인가?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거대하고 무서운 기만에 대하여,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는 <그것이 아닌 삶>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톨스토이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뭘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이 질문을 품에 안고 몇 일을 보냈습니다.

처형댁에 김장을 하러 갔습니다. 분주히 김장을 준비하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그 질문이 내게 다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빛이 여러갈래길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톨스토이가 내게 “지금 당장 그곳으로 풍덩 뛰어들라!”라고 명령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서, 김장을 담그는 그 순간에서, 그 시간을 보내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진심으로 바라보고, 가족들과 함께하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듯 하였습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팔을 걷어 부치고 그곳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생활방식(life style)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인식하고 선택하는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같은 사건, 같은 사람에 대하여 어떤 태도와 방식을 지니고 대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의식하고, 이해하고, (연민, 화해, 용서를 포함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삶을 대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