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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비극미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인공은 죽을때 말을 많이 하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엑스트라는 금방 죽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P.251

미美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P.252

15. 위악과 위선

교도소 재소자들의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악’僞惡입니다. ‘위선’僞善과는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먹이 있거나 성질이 있어야 한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저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에 맞기도 합니다. P.266

노촌 선생님 말씀은, 야쿠자 방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폭력 투쟁이고 노인 방은 이론 투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폭력 투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승패가 납니다. P.272

16. 관계와 인식

관계와 애정 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이 글의 단초가 된 일본인 기자는 한국 근무 4~5년차의 베테랑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빈번하게 이사하는 까닭은 기마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가를 전전하는 고달픈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P.280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 P.283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인간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입니다. 입장의 동일함을 좁은 의미로 읽지 않기 바랍니다.

지식인은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입니다. P.284

17. 비와 우산

“네가 껌 사는 이유를 내가 얘기할까?”

그가 밝힌 껌을 산 이유는 껌팔이 소년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것이라는 논리였어요.

그러는 너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나는 추호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단호한 답변이었습니다.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쟤는 하루종일 껌 한개도 못 팔겠네.”

“물론 못 팔지! 그러나 세상에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껌팔이가 없는 사회가 되는 거지!”
나눔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결코 무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칼 같은 그의 선언은 역시 젊은 시절의 이념적 언어였습니다. 우선은 껌부터 사는 것이 순서인것입니다. P.295

18. 증오의 대상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평화시장에는 전체 인원 2천 명에 공용 화장실이 3개 밖에 없었습니다. 화장실 앞에서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끊이지 않는 싸움, 그것이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성과 아무 상관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P.303

여름 잠자리의 옆사람과 싸가지 없는 동료 재소자에 대해서 키워 왔던 증오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리고 감옥 속에 않아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기도 하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겨울 독방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증오 역시 그때의 증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반성을 합니다. 증오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 감각에 의해서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랍니다. P.304

그때는 그나마 여름과 겨울이 더위와 추위로 칼같이 나뉘어져서 여름에는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에는 여름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겨울도 춥지 않고, 여름도 그때처럼 덥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서슬 푸르게 벼를 수 있는 계절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것인가가 과제라면 과제입니다. P.305

19. 글씨와 사람

서도에서 더 중요한 것은 환동還童입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합니다. 전 시간에 대교약졸을 소개하면서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 하다고 했습니다. 이 대大라는 것은 최고의 의미이고 노자의 경우 최고의 준거틀은 당연히 자연이라고 했습니다. 기교라는 것은 반자연反自然입니다. 최고의 기교란 졸렬한 듯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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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푸른 보리밭

“신중위님, 나 진짜 살고 싶어요.”

13. 사일이와 공일이

책 제목마저 기억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독서가 독서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실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독서이기 때문입니다. 화분속의 꽃나무나 다름없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실천’이 제거된 구조입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한 발 보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226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최말단에 밀려나 있는 자기의 처지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를 두고도 “사람은 좋은데 사상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먹물들은 연설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점을 극히 경계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 많은 삶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가게 됩니다. 이 과정이 서서히 왕따를 벗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었습니다.

‘톨레랑스’, 프랑스의 자부심이며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기도 합니다. P.229

노인 목수 문도득의 집 그리는 이야기

내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톨레랑스와 관용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노인 목수의 집 그림을 앞에 두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
이것이 톨레랑스의 실상입니다. P.231
(톨레랑스 : 관용의 정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등장. 수십만의 신교도가 목숨을 잃고 자기와 다른 신앙과 사상,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사용.)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근대 사회의 최고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P.231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변화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 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을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35

감쪽같이 숨기고, 대담하게 운반하는 등 막강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동문고 네트워크가 바로 인간적 신뢰입니다. 나는 이것이 자기개조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237

‘떡신자’는 사실 쪽팔리는 별명입니다. 명색이 대학교 선생 하다가 들어와서 떡신자라는 별명이 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문과 이미지가 아마 인간적 신뢰 형성에는 이동문고보다 월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운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사람 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P.239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P.242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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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양복과 재봉틀 – 장자의 반기계론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장자]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이 구절을 만났을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불구자의 자기성찰입니다. 불구자인 산모가 깜깜한 밤중에 혼자서 아기를 낳고 그 무거운 몸으로 급히 불을 켜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비추어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경황없는 중에도 급히 불을 켜서 비추어보는 이유에 있습니다. 급히 불을 켜서 갓난 아기를 비추어 본 까닭은 유공기사기야唯恐其似己也입니다. 그 아기가 혹시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자기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모정입니다. 산모는 자기가 불구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갇혀 있는 문맥 그리고 한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를 성찰하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구의 산모 여지인의 몸짓은 그 통절함이 과연 자기 성찰의 정점입니다. P.152

10. 이웃을 내 몸같이

무감어수無鑑於水, 물에 비추어 보지 마라는 뜻입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면 자기의 인간적 품성이 드러납니다. .. 오나라 부차, 진나라 지백, 아버지, 동생, 친구, 동료… P.155

11.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며. 수주대토

정나라 차치리 이야기. 자기발 본뜨고 시장에 탁을 가지고 가는걸 잊고 다시 돌아갔다 오니 시장은 이미 파했다는 이야기. 영신탁寧信度 무자신無自信,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이론과 현실과) P.171

대비와 관계의 조직

좌.우 / 상부.토대 / 인>과, 과>인

bookmark_border셧업앤댄스

“원준아,
에어로빅은 어때?
재밌어?”

“아니 재미없어
근데 할거야” – 64화

“사실… 에어로빅은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고
좀 창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멋지게 최선을 다하는거야!” – 마지막 파이팅을 외치면서. 65화

“너는 고된 인생을 살지도 모르겠다.
상처받아 좌절할 일도 있겠지.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춤추는 거야.”
– 가네시로 가즈키 (이교도들의 춤中) 66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던 셧업앤댄스 웹툰이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청소년기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입니다. 가볍던 이야기가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꿈에 대한 이야기이고 연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꿈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되고, 지금 나의 꿈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 꿈을 진짜로 사랑하는가?
내가 정말로 그 꿈을 좋아했던가?
그런데, 나는 왜 지금 웃고 있지 않은가?

춤을 춥니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인것처럼 춤을 춥니다.
그냥 춥니다. 끝까지 춤을 추는 겁니다.

묻고 의심하고 의식하는 순간 나의 춤은 흩어지고 무너집니다. 끝까지 춤을 춥니다. 춤판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춤판이 기다립니다. 그 춤이 잘못된 춤이라면 더 좋습니다. 그 끝에 더 좋은 춤판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추고 있는 춤의 순간 순간에 집중할 뿐입니다. 동작 하나하나에 말이죠.

아이들 하나 하나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들은 다른이가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하나 하나 문제를 풀어갑니다.
함께 가면 됩니다. 옆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됩니다. 그 문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스로 그 문제들을 대면하며 풀어가면 됩니다.
그러니 나는 그 옆에서 (그와 연대하며) 나의 일을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에어로빅을 함께 배우고, 함께 콜라를 나눠마시며 함께 웃고 떠들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문제들은 하나 하나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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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화동和同 담론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79

6.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정치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의 세가지라고 대답합니다.
부득이 없애야 한다면? 兵 > 食 > 信 순으로
그러나, 관중이라면 信 > 兵 > 食 P.92

다산의 [목민심서]도 그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탕에는 백성을 기른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식食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삼고 민民의 욕망과 정서를 승인하는 것이 반드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중의 패권논리는 역사적으로 현실 적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P.92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직접민주제가 실현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대의제代議制입니다. 대의제는 중간계급을 승인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이 실은 민民보다 인人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경연처럼 최고 권력까지 규제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치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입니다. 예외없이 이러한 계급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가 장수하는 역설적 이유입니다. P.96

“군자도 궁할때가 있습니까?”
자로의 노여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의외로 조용하고 간단합니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이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 P.102

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16

봉생마중 불부이직 (蓬生麻中不扶而直) – 순자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P.119

8. 잠들지 않는 강물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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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랑하는 예술가

엄마와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 -> 닮았겠구나. 곧 커서 엄마가 되겠구나.

현실을 현실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分하고 석析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해 버립니다. 사과를 쪼개면 그래도 쪼개진 각각의 조각이 여전히 사과입니다. 만약 사람이나 토끼를 쪼갠다고 하면 그 쪼개진 조각을 여전히 사람이나 토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비약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상화, 타자화 하게 되면 이미 우리의 세계가 아닌것이 됩니다. 주체와 분절된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대상과 분절된 주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관념적으로만 가능하고 실험실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의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P.4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 장기수 할아버지
좌경적 이론 :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
우경적 실천 :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 P.43 P.44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체게바라 P.45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P.52

귀곡자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사의 배치가 전투력을 좌우하듯이, 언어의 배치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닉rhetoric(미사여구)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서 ‘說’자는 ‘설’說 자로 쓰고 뜻은 ‘열’悅(기쁠열)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言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틑 레토닉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P.54

상대방을 설특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것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P.55

4. 손때 묻은 그릇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체,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 하여 다른것과의 관계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가지의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 ‘겸손’입니다.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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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책커버
  • 저자 : 신영복
  • 출판 : 돌베게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1. 가장 먼 여행

나는 20년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p.14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 지식은 지식이라기 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P.15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 인식과 성찰이 공부입니다. P.18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도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고생 그 자체입니다. P.18

<머리-가슴-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P.19

2. 사실과 진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쉬르의 언어구조학이 그것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합니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4

영상서사 양식 vs. ‘바다’ 단어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인식이란 양적인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악의 상상력,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을 소중히 계승하되 이것이 갖고 있는 결정적 장단점을 유연하게 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P.29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 중영복 선생님의 강연 中

엽서를 읽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사람들은 그걸 10분 짜리로 착각해요. 나는 그걸 한달 동안 머릿속에서 교정을 반복하며 써요.

누구든 한달을 쓰면 그 만큼 써요.

지식의 지도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매일 보고 고치고 해요.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요.

유법불가 무법불가 有法不可 無法不可
법은 오래된 미래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해요. 그러나 법에 틀에 규칙에 갖혀서는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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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

최진석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이보다 더 빛나는 한 줄이 또 있을까? 구도자들은 신을 향해 걷는 방식으로 포장해서 사실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고독한 구도자를 닮는다. 구도자들이 보통의 삶을 끊은 채, 자신이 걸어야 할 궤도를 스스로 짠 후, 일부러 거기에만 맞춰 돌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마저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고백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멀어진다는 건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부분은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의 문을 열지도 않는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에는 쉽고도 강하게 빠지면서,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따르는 일은 왜 그리 어려워하는가. 여기서 쉽고 어려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밖에서 오는 ‘바람직함’은 쉽게 알 뿐만 아니라 확신의 힘으로 날렵하게 따르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오는 ‘바라는 것’은 알기도 어렵거니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기는 너무 두렵다.

‘바람직함’은 밖에 이미 정해져 있어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지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대등한 문법까지도 이미 펼쳐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만 하면 된다. 숙고하거나 사유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신은 심지어 자신에게마저도 비밀스럽다. 자신을 알려면 사유하고 숙고하는 수고를 심하게 들여야 한다.

힘든 일은 피하고 힘들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 게으른 존재들은 힘들여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만 한다. 데미안의 말은 분명하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밖에서 주어진 것을 살기는 쉽고,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살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에서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내팽겨진 자신을 되찾아야 정치와 종교와 도덕이 제 자리를 잡는다.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를 살리지 못한다. 정치와 도덕과 종교는 닫혀 있고, 자신은 호기심으로 열려 있다. 호기심으로 열린 그 틈새를 비집는 일을 우리는 생각이라고도 하고 사유라고도 한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사유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며 정해진 것에 틈을 내어 자신을 그 틈새에 끼워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익숙함과 믿음에 균열이 가면서 자신이 열려가는 과정을 “데미안에 의해 눈뜨게 된 사유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어렵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쉽다.

진짜 인간은 세계를 지니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유하여 알려고 한다. “내면에 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반대로 나무나 돌, 기껏해야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최초로 번쩍 빛나는 순간, 그는 바로 인간이 된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알려고 하는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당사자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던 편안하고 안락한 것들에 심한 균열이 가는 것을 경험한다. 회개이자 참회일 수도 있다.

싱클레어의 균열은 거짓말로 시작된다. 거짓말은 가끔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려는 태도인데, 금지된 것 너머를 엿보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싱클레어는 우선 익숙한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자기 자신 이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자는 멈춰 있는 정해진 자신을 우선 거짓된 존재로 조작해서 거기에 금을 내고 쪼갤 준비를 해야 한다.

‘거짓말’도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 이상으로 넘어가는 도전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싱클레어는 밝고 환하며 기품 있던 세상에서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어둡고 칙칙한 세상과 인연을 맺는다. 모든 새로운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려움 속에서 싱클레어는 어둠을 이미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가족들은 여전히” 밝고 환한 곳에서 멈춰선 채 싱클레어를 “애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밝고 환한 세상의 중심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다. 거짓말을 매개로 “다른 세계”로 추락한 싱클레어는 마침내 “죄를 짓고 불행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영원히 품을 수 없는 세계를 싱클레어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탈하여 이제 싱클레어는 그런 사람들과 투쟁하는 방황을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세계를 깨뜨리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태어난 세계로는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뿌리를 내려가는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은 평화롭고 밝은 자기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생경해 보이는 풍경이다. 어두운 “다른 세계”와 밝고 익숙한 세계 사이에 끼면 이 생경함의 엄습을 피할 수 없지만, 생경함은 어떤 방도로도 해석할 수 없어 신비의 꿈결 같기도 하다.

방황은 종종 방탕을 낳기도 하니, “방탕한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살기 위한 최상의 준비 활동”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그냥 방탕에 빠진 싱클레어를 가볍게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클레어의 방황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세계에 낀 자의 사명은 방황과 방탕 속에서도 양쪽 세계를 품어야 하는 운명으로 진화하는 일이다.

이 진화를 먼저 해낸 데미안의 모습을 보라. 데미안은 언제나 “자신만의 법칙대로 사는 듯 진귀하고 고독하고 조용하게 걷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걷는 자는 사이에 낀 채 혹은 양쪽을 품은 채 고독하다.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고독한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有)의 세계와 ‘무’(無)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품어야 ‘도’(道)라고 말하는 노자는 아브락사스의 중국판이다. ‘유’와 ‘무’를 동시에 품은 노자도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했다. 양쪽을 품은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인위적 절반에 갇혀 폐쇄적인 자는 사랑을 학습하거나 거래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존재와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고 싱클레어가 “이제 홀로 있을 수 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말 한 것은 자신을 향해 걸었던 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여 문득문득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는 뜻이겠다.

사랑은 고독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자신으로 돌아간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왕국인 것이다. 사랑은 도덕과 무관하다. 도덕은 한 쪽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칼끝이 조금이라도 향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음악을 닮았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도달하여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든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을 닮았다.

신은 고독의 정상에 있다. 정상에 있어야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허용된 양쪽을 다 자신의 세계로 일치시킬 수 있다. 아브락사스는 그래서 소리로만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도달하면 신처럼 정상에 선다. 당연하게도 “각자를 위한 당연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아브락사스를 추종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브락사스가 되는 일인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자신에게 도달한 개방적 존재다. 고독과 개방이 일치하다니.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인 천직을 성실히 수행하면, 신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눈을 감고,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입맞춤 후에 신은 떠나고 자신만 자신으로 남았다. 신은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진짜로 살아보려는 자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도달한 자라면 그가 신이다. 자신에게 도달한 자가 아브락사스다. 네가 신이다.

bookmark_border자기 앞의 生

La Vie devant Soi

  • 저자 : 에밀 아자르 (로맹가리)
  • 역자 : 용경식
  • 출판사 : 문학동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p.13

“난 뭘 하기에 너무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아줌마.” p.259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p.268

사랑해야 한다. p.311


로쟈와 함께 문학속의 인생1

  •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 자전적. 자전문학
  • 로맹가리 (1914 ~ 1980)
    에밀 아자르
    예순 여섯에 권총자살 (1980)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두번의 콩쿠르상
    (3대 문학상 : 노벨문학상, 부커상(영국), 콩쿠르상(프랑스))
  • <새벽의 약속>
    이혼할 무렵
    어머니와의 관계 정산. 15년간의 애도. 상실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
    이후 진세벅 (보호할 여자). 79년 의문사. 약물. 자살?. FBI 관련. 보호 못한 책임
  • <자기 앞의 생>
    아들 디에고
    스페인 가정부 (로자 아줌마 모델)
    “디에고가 어떻게 읽었을까?”
    아들을 위한 작품.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것
    모모의 아버지. 죽음으로 대신.
    예술가로서의 삶 vs. 어이없는 죽음.
    잘 죽어야 함.
  •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小예술론 : 예술과 삶은 별개. 예술은 트릭
    大예술론 : 삶 전체가 예술과 등가. 인생문학. 다자이오사모(일본작가)
    꾸며낸 이야기가 감동을 주기는 참으로 어렵다.
  • 가족 소설. 확대 가족 소설
    사랑해야 한다.
    모모-로자 아줌마 처럼
    거래. 우연한 가족 -> 확대 가족. 혼외(혈연외) 가족
    좀도둑 가족 (칸느 수상작), 원제 : Shoplifters, 어느 가족 (한국)
    가족의 의미
    혈연 가족이 갖는 배타성
    가족 실험. 공동체 실험과는 다름.
    프랑스. 유대인. 회교도
    <이상한 정상가족> – 김희경
    정상 : 다분히 폭력적인 언어
    아버지가 왜 안계시니?
    다문화. 편모
    우리는 가족 내에서도 차별 (서자)
    <인간의 운명> – 솔로호프
  • 자기 앞의 생 (여생)
    디에고에게
    다 죽고 다 잃은게 아니다.
    ‘사랑’이 있다.
    그러면, 살아 갈 수 있다.

bookmark_border카프카의 <변신>

  • 저자 : 프란츠 카프카
  • 역자 : 전영애
  • 출판사 : 민음사

로쟈와 함께 문학 속의 철학 읽기2

  • 카프카의 <변신>- 변신의 의미와 한계
  • 20세기 문학의 대표작
    – 카프카의 문학 행위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 체코인. 독일어로 씀. 동화된 유대인
    – 문학 자체가 사적
  • 카프카
    – 1883 ~ 1924
    – 아버지 : 자수성가. 성공한 유대인, 단단한 체구. 프라하. 상류층(7%)을 위해 독일학교에 보냄. 프라하의 상류층.독일인. 유대인은 낮은층.
    – 남동생 둘은 일찍 사망. 여동생 셋은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
    – 부모의 기대. 원망하지는 않음.
    – 하루키가 비슷. 해변의 카프카
    – Kafka : 자모자자모음. Samsa : 잠자. Bende. 자신의 분신들
  • 막스 브로토(친구)가 유언 집행
    – 1912. 변신
    – 1914. 소송
    – 1922. 성
  • 부자 관계를 다루고 해결하고 싶었던…
    – 글쓰고 싶은 자신의 욕구 vs. 아버지의 기대
    – 어느 한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음.
    – 선고(판결) – 게오르크 반데만.
    러시아 친구(예술가) vs. 게오르크(시민)
    아버지 : 더 아들 같은 vs. 익사형을 선고
    시민과 글쓰기
    양립 가능한것 같지 않아 파혼
    –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건의 책 분량. 항의. 아버지를 화나게 하지는 않음(어머니에게 보냄)
  • 변신
    – 벌레
    카프카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독자만 알아듣는
    – 그레고지 잠자
    외판원. 아들. 오빠 -> 나중에 ‘그것’이 됨 (벌레) -> 식음전폐. 스스로 죽음 -> 가족의 행복을 기대.
  •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였지만 부모를 사랑. 복종.
    – 어린 기억. 어린 카프카 물마시러 ‘똑똑’
    – 무죄 vs. 유죄
    – 둘은 해소되지 않고 끝까지 유리.
  • 시민사회에서 예술가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부조리

문학에 대한 비평과 해설은 내가 느끼고 감동받았던 부분, 그것이 비록 무지와 오해, 과장과 확대해석속에서 받았던 감동일지라도 그 사랑(감동)을 일정부분 훼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강의였습니다.

처음 카프카의 변신을 접하고서 나는 몇 주 같은 생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거 뭐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지? 벌레가 되었다 죽은 이야기는 뭐지? 뭘까?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같은 생각을 하며 산책길을 거닐다 나는 한참을 얼어붙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벌레가 되어 있다면?’
그러면 장차 나에게 일어날 일들을 빤히 보여주고 있었으며,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도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처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변치 않는 존재인것 마냥 살고 있지만, 나는 어느날 이 가족들 사이에 ‘뚝’ 떨어져서 나의 역할과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상태와 나의 역할이 깨어졌을때, 나의 아내와 나의 딸, 나의 아버지는 나를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아니, 그전에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나는 나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의미. 내 삶의 의미 따위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그저 그 사이에 ‘뚝’ 떨어졌을 뿐입니다. 그러하니, 나는 내 존재의 의미, 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온전하게 존재할때 나와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하니, 나는 나를 누구보다 더욱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니, 나는 다른이들을 힘껏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