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주는 것은 거짓이다. 세계의 진짜 모습은 이성을 통해서 존재를 꿰뚫어 봐야 알 수 있다.’
서양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아이디어.
우사인 볼트의 100미터 기록은 정말일까? : 제논과 멜리소스 : 변화와 운동은 가능한가?
멜리소스의 논증
변화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데, 변화하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변화는 불가능하다.
제논의 역설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역설, 이분법의 역설, 나는 화살의 역설, 기차역의 역설
‘운동이 가능하다’면 이런 모순이 발생하므로 ‘운동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 반론
공간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면 시간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
찰나(1/75초)와 순간 : 찰나는 시간적 길이를 갖지만, 순간은 시간적 길이가 없다. ‘한순간 화살이 정지하므로 운동할 수 없다’는 주장을 비판.
베르그송의 반론
시간은 공간과 달리 더하거나 빼고 나누고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냥 흐르는것이다.
나는 정말로 나인가? : 테세우스의 배 : 변화와 동일성의 문제
마이클젝슨은 여전히 마이클젝슨이다.
테세우스의 배
널빤지를 교체한 1000일 후의 배 A
교체된 널빤지로 만든 배 B
처음배가 A, B배와 동일하다면, A배와 B배는 동일한가?
동일(同一, one and the same) 하다는 것은 하나라는 말인데?
변화와 동일성에 대한 3가지 지속이론
이동지속이론 : 오리지널 배가 A배와 동일하다. 아리스트텔레스
확장지속이론 : A배와 B배 두척이 있다. 테세우스의 배는 변한것이 아니고, 개별자가 일정 시간에 걸쳐서 존재한다. 파르메니데스
찰나지속이론 : 모든 배가 다른 배. 헤라클레이토스
아이슈타인의 등판
확장지속이론의 문제 : 커피의 진짜 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합한 것이라고 했는데, 과거의 뜨거운 커피와 미래의 차가운 커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의 부분일 수 있는가?
상대성이론의 시간지연 현상 :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짐.
뜨거운 커피도 과거 시점의 ‘거기’에 존재하고, 차가운 커피도 미래의 ‘거기’에 존재한다.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두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P.242 P.243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지.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한거지.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거야.
미움받을 용기
나는 과연 변화하고 싶기는 한것인가? 그리고, 내가 변화하려고 애를 쓴다면 변하기는 하는것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기 싫다.’ 이 무슨 개떡같은 생각입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개떡같은 생각으로 4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걸요.
‘일찍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기 싫다’. 이 두 생각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이 두려울 뿐입니다. 동시에 변하지 않아 생기는 ‘불만’을 참아내기 위해 ‘일찍 일어나겠다’는 각오를 되새길 뿐입니다.
더이상 나는 그 ‘불만’을 참아낼 수 없어,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고, 이것 저것 공부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변했나요?
물론입니다. 나는 변했습니다.
나의 변화는 나의 내면에 잠재적 가능성으로 담지되어 여기 저기 나의 생활속에서 생활양식(Life Style)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운동은 관성의 법칙을 갖고 있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다고 나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완료적인 변화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가 변했는지 관찰하고, 자그마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감사하고 물을 주며 키워보려고 합니다.
우주론적 논증 최초의 원동자, 신 : 최초의 도미노를 쓰러트린 신, 부동의 원동자 (The Unmoved Mover), 제1원동자 최초의 원인, 신 : 원인과 결과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 사건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반론 – 꼭 제1원인이 필요한가? -러셀 –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 원인과 결과는 주관적 상상일 뿐이다 – 흄, 당구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 앞에서 겸손하고 두려워 하며, 사랑하고 선하게 살아야 함을 느낍니다. 내가 그것들을 부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명학의 핵심은 ‘심즉리’心卽理입니다. ‘마음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주체성의 선언입니다. 주자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였습니다. 성性이란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心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천명天命, 천성天性, 천리天理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실천이 진리를 담보한다는(만든다는) 주장입니다. … 양명학의 3강령은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입니다. P.400
지행합일은 양명학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주자학은 지知와 행行을 선후관계로 놓습니다. 선지先知, 먼저 알고 후행後行, 나중에 행하는 구도입니다. 독서궁리讀書窮理, 즉 책을 읽음으로써 진리를 도달한다는 논리입니다. 양명학에서는 독서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아닙니다. 지知와 행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독서를 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서 삶의 현실 속에서 진리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것을 사상마련事上磨鍊이라고 합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연마해야 합니다. P.401
‘Here and Now’ 그리고 How가 물리 방식의 실사구시라면, ‘Bottom and Tomorrow’와 Why가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양명학과 강화학은 근본을 천착합니다.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입니다.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됩니다. P.403
피 팔기전 찬물을 가득 마신 어려운 가정의 소년 가장 이야기. …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내게는 가책을 받았고 지금도 가책을 받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고집은 반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가족의 끼니를 위해서 병원의 새벽 수도꼭지에서 찬물을 들이키며 그가 감당해야 했던 양심의 가책이 마음 아팠습니다. …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양심’이라는 단어를 만날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P.406
‘양심적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낮습니다. 낮을 뿐 아니라 부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며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양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역량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 해야 합니다. P.408
24. 사람의 얼굴
나의 연상세계는 대단히 창백했습니다. 노래의 연상세계와는 달리 내가 구사하는 일상적 개념의 연상 세계는 매우 관념적이었습니다. ‘실업’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경제학 개념이었습니다. ‘빈곤’은 엥겔계수가 연상되었습니다. 메마른 이론과 개념으로 뒷바침되고 있는 생각이란 얼마나 창백한 것인가. 창백한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P.411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 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것처럼. P.418
이 괘의 이름이 박剝입니다.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 맨 위의 상효 하나만 양효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언제 음효가 될지 알 수 없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석과불식은 바로 이 마지막 하나 남은 양효의 효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석과불식은 ‘씨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419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찹니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지혜이며 교훈입니다. 이제 이 교훈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소임을 하나씩 집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엽락葉落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잎사귀는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입니다. 엽락이란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불혹不惑과 같은 뜻입니다. … 가망 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품을 청산하는 단호함입니다. P.420
다음이 체로體露입니다. 그림에 보듯이 엽락 후의 나무는 나목裸木입니다.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뼈대가 휜히 드러납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구조와 뼈대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P.421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분糞은 ‘거름’입니다. 분본이란 뿌리(本)를 거름(糞)하는 것입니다. 그림이 보여줍니다. 낙엽이 뿌리를 따뜻하게 덮고 있습니다. … 뿌리가 바로 사람이며 사람을 키우는 것이 분본입니다. P.421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 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P.422
수형생활 10년차의 재소자가 자살했습니다. …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때문이었습니다. …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는’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이유였습니다. P.424
독버섯 이야기 …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P.426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변소문 꽝 닫는 사람의 경우도 그 행위만으로 단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불가피한 사연이 있으리라는 춘풍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는 자기 자신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생각을 단념해야 합니다. P.326
이 짜장면 사건(?)의 교훈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반성이 있습니다. 나는 직관적 판단을 그것도 재빨리 하고 있었습니다. 수학 문제도 빨리 풀고 상황 판단도 빨리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절대로 빨리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때 굳게 결심했습니다. 절대로 미리 속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한 박자 늦추어 대응하자. 심지어는 나를 지목해서 욕하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나보고 하는거 아니지!” P.328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는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보다 강한 것이어야 하는 강철의 논리로 일관된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모든 나라들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선을 흡수 합병한 메이지明治 일본의 탈아론脫亞論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리에 희생된 나라들 마저도 그러한 논리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논리와 싸워야 할 해방운동마저 그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P.336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 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뜨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P.337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부정적 집합표상集合表象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representation)은 인간의 인식 활동입니다. 우리는 남산을 바라보지 않고도 남산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격리되어 있지만 대상을 재구성하는 인식 능력입니다. 대상은 그에 대한 1개의 표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표상 즉 집합표상으로 구성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고유의 집합 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라는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봉건제의 집합표상이 청산되지 않는 한 프랑스 혁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봉건제의 집합표상은 완고하고 위력적입니다. 귀족.성벽.기사.아름다운 공주와 왕후.화려한 마차 행렬 그리고 귀족들에 얽힌 존경스러운 신화와 공주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는 서민들의 연민도 집합표상을 구성합니다. 참으로 위력적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P.343
프랑스 혁명의 양심 로베스피에르도 혁명 이후의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만큼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고민을 부탁합니다. 여행은 떠남, 만남, 그리고 돌아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자기를 칼같이 떠나는 것입니다. P.345
21. 상품과 자본
그러나 경제학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사용가치가 아닙니다. 쌀의 가치는 일용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른것과 교환될 때의 비율이 가치입니다. P.347
사람 1명 = 구두 1켤레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두 10 켤레로 하면 어떻까요? 그래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구두로 표현하다니. 그러나 구두 10 켤레 대신 ‘연봉 1억’이라면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P.349
근사한 로펌 변호사 부인의 이야기 … 결론인즉 ‘그 부인의 친정이 굉장히 부자인가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부 관계 역시 등가관계로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인간관계마저도 화폐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천민적 사고입니다.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