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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푸른 보리밭

“신중위님, 나 진짜 살고 싶어요.”

13. 사일이와 공일이

책 제목마저 기억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독서가 독서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실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독서이기 때문입니다. 화분속의 꽃나무나 다름없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실천’이 제거된 구조입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한 발 보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226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최말단에 밀려나 있는 자기의 처지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를 두고도 “사람은 좋은데 사상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먹물들은 연설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점을 극히 경계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 많은 삶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가게 됩니다. 이 과정이 서서히 왕따를 벗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었습니다.

‘톨레랑스’, 프랑스의 자부심이며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기도 합니다. P.229

노인 목수 문도득의 집 그리는 이야기

내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톨레랑스와 관용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노인 목수의 집 그림을 앞에 두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
이것이 톨레랑스의 실상입니다. P.231
(톨레랑스 : 관용의 정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등장. 수십만의 신교도가 목숨을 잃고 자기와 다른 신앙과 사상,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사용.)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근대 사회의 최고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P.231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변화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 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을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35

감쪽같이 숨기고, 대담하게 운반하는 등 막강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동문고 네트워크가 바로 인간적 신뢰입니다. 나는 이것이 자기개조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237

‘떡신자’는 사실 쪽팔리는 별명입니다. 명색이 대학교 선생 하다가 들어와서 떡신자라는 별명이 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문과 이미지가 아마 인간적 신뢰 형성에는 이동문고보다 월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운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사람 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P.239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P.242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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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양복과 재봉틀 – 장자의 반기계론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장자]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이 구절을 만났을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불구자의 자기성찰입니다. 불구자인 산모가 깜깜한 밤중에 혼자서 아기를 낳고 그 무거운 몸으로 급히 불을 켜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비추어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경황없는 중에도 급히 불을 켜서 비추어보는 이유에 있습니다. 급히 불을 켜서 갓난 아기를 비추어 본 까닭은 유공기사기야唯恐其似己也입니다. 그 아기가 혹시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자기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모정입니다. 산모는 자기가 불구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갇혀 있는 문맥 그리고 한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를 성찰하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구의 산모 여지인의 몸짓은 그 통절함이 과연 자기 성찰의 정점입니다. P.152

10. 이웃을 내 몸같이

무감어수無鑑於水, 물에 비추어 보지 마라는 뜻입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면 자기의 인간적 품성이 드러납니다. .. 오나라 부차, 진나라 지백, 아버지, 동생, 친구, 동료… P.155

11.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며. 수주대토

정나라 차치리 이야기. 자기발 본뜨고 시장에 탁을 가지고 가는걸 잊고 다시 돌아갔다 오니 시장은 이미 파했다는 이야기. 영신탁寧信度 무자신無自信,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이론과 현실과) P.171

대비와 관계의 조직

좌.우 / 상부.토대 / 인>과, 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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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화동和同 담론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P.79

6.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정치란 식食과 병兵과 신信의 세가지라고 대답합니다.
부득이 없애야 한다면? 兵 > 食 > 信 순으로
그러나, 관중이라면 信 > 兵 > 食 P.92

다산의 [목민심서]도 그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탕에는 백성을 기른다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식食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삼고 민民의 욕망과 정서를 승인하는 것이 반드시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중의 패권논리는 역사적으로 현실 적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P.92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직접민주제가 실현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대의제代議制입니다. 대의제는 중간계급을 승인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이 실은 민民보다 인人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경연처럼 최고 권력까지 규제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치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입니다. 예외없이 이러한 계급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가 장수하는 역설적 이유입니다. P.96

“군자도 궁할때가 있습니까?”
자로의 노여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의외로 조용하고 간단합니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이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 P.102

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큰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것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16

봉생마중 불부이직 (蓬生麻中不扶而直) – 순자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P.119

8. 잠들지 않는 강물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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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랑하는 예술가

엄마와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 -> 닮았겠구나. 곧 커서 엄마가 되겠구나.

현실을 현실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는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分하고 석析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해 버립니다. 사과를 쪼개면 그래도 쪼개진 각각의 조각이 여전히 사과입니다. 만약 사람이나 토끼를 쪼갠다고 하면 그 쪼개진 조각을 여전히 사람이나 토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비약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상화, 타자화 하게 되면 이미 우리의 세계가 아닌것이 됩니다. 주체와 분절된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대상과 분절된 주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관념적으로만 가능하고 실험실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의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P.4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 장기수 할아버지
좌경적 이론 :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
우경적 실천 :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 P.43 P.44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체게바라 P.45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핵심을 요약하고 추출할 수 있는 추상력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문제를 옳게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이 해결되고 있다”고 합니다. P.52

귀곡자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사의 배치가 전투력을 좌우하듯이, 언어의 배치가 설득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닉rhetoric(미사여구)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에서 ‘說’자는 ‘설’說 자로 쓰고 뜻은 ‘열’悅(기쁠열)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言의 배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틑 레토닉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P.54

상대방을 설특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것이여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P.55

4. 손때 묻은 그릇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체,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관계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 하여 다른것과의 관계속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가지의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 ‘겸손’입니다.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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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책커버
  • 저자 : 신영복
  • 출판 : 돌베게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1. 가장 먼 여행

나는 20년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의 상한上限이 공감입니다. p.14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 지식은 지식이라기 보다 지식의 파편입니다. 세상은 조각 모음이 아니고 또 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강의는 여기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갈 것입니다.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P.15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 인식과 성찰이 공부입니다. P.18

옛날에는 공부를 구도求道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도는 반드시 고행이 전제됩니다. 그 고행의 총화가 공부입니다. 공부는 고생 그 자체입니다. P.18

<머리-가슴-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P.19

2. 사실과 진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쉬르의 언어구조학이 그것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은 지극히 왜소합니다. 작은 컵으로 바다를 뜨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컵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이 바닷물이긴 하지만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4

영상서사 양식 vs. ‘바다’ 단어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인식이란 양적인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악의 상상력,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을 소중히 계승하되 이것이 갖고 있는 결정적 장단점을 유연하게 배합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문사철의 추상력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 논리, 시서화악의 상상력과 함께 그것의 주관성과 관념성, 그리고 영상서사의 압도적 전달력과 함께 인식주체의 소외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P.28 P.29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 중영복 선생님의 강연 中

엽서를 읽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사람들은 그걸 10분 짜리로 착각해요. 나는 그걸 한달 동안 머릿속에서 교정을 반복하며 써요.

누구든 한달을 쓰면 그 만큼 써요.

지식의 지도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걸 매일 보고 고치고 해요.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나요.

유법불가 무법불가 有法不可 無法不可
법은 오래된 미래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해요. 그러나 법에 틀에 규칙에 갖혀서는 안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