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2025-29-100

법정 스님 법문집 – 2

“어떤 사람이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마한 일에 화를 내 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 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하는 이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여시어경

또한 부처님은 묵빈대처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침묵으로써 물리쳐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스스로 사라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맑은 가난은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맑은 가난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변화한다. 이것도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자각한다면 이미 큰 지혜에 이른 것입니다. 아름디운 여자를 보았을 때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변화한다. 이것도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자각한다면 쉽게 청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우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도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변화한다. 이것 역시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자각한다면 요동치는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나는 매우 평화롭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는 아직 이것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모르고 있다. 이 또한 영원하 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이 아플때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몸이 나아져 갈 때 “그래, 이거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살아 있는 한 조만간 또 다시 아플 일이 있을 것입니다. 등이 결리고 허리가 쑤실 것입니다.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불행은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십시오. 행복은 행복이고, 불행은 불행일 뿐입니 다. 그것에 좋고 나쁨을 대입할 때 고통과 불만족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나쁜 습관입니다. 그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다만 지켜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금강보좌는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각자의 금강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와 집념, 금강석으로 된 자신만의 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은 한때입니다. 한때에 꺾여선 안됩니다.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음의 변덕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
항상 마음을 잘 다스려서 부드럽고 순하고 고요함을 지니도록 하라.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고,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만든다.
그러니 마음에 쫓아가지 말고, 항상 마음의 주인이 되도록 노력하라.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보면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함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생과 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고.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이것이 출가 정신입니다. 이 각오. 이 정신을 늘 지녀야 합니다.
출가란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 출가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하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혼하고 집을 나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릇된 생활 습관과 잘못된 업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 다. 새로운 업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욕망에는 근심이 따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불필요한 욕구는 고통을 가져읍니다. 자기 주변을 정리해야 합니다. 어디로 이사 갈 때만이 아니라, 계절이 바필 때마다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너저분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때 필요해서 사들인 것들이 집 안에 쌓이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집을 가나 사람이 가구와 물건에 짓눌려 옹색해집니다.

저의 출가는, 저의 존재의 절실한 요구였습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저를 그 길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자기답게 살려는 사람이 자기답게 살고 있을 때는 환희심으로 충만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고통과 번뇌가 따릅니다. 자기 몫의 생을 아무렇게나 소비해 버릴 수는 없는 까닭에 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자신을 붙들어 두고 근원적인 의문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안락함, 편안함, 타성, 즐거움을 거듭 거듭 떨치고 새롭게 출가해야 합니다.
출가는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입니다. 진정한 나에게로, 그동안 잊혔던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출가는 소음과 잡다한 얽힘에서 벗어나 침묵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말이 안으로 여물도록 인내함으로써 우리 안의 질서를 찾습니다. 중심을 바로 세워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가려내는 그런 눈뜸입니다.

출가는 고통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고통으로 인도하는 고통이고, 하나는 고통의 끝으로 인도 하는 고통입니다.

저를 한반중에 깨워 준 기침보살에게도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병고로써 좋은 약을 삼으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자연계의 꽃이나 잎은 그렇다 치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과 신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입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은 무익합니다. 그것은 죽어 있는 삶 입니다. 나무들을 보십시오. 파릇파릇 새 움이 트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제의 나무가 아닙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기량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묵은 수렁에 갇혀서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무가치한 일로 죽이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을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 하루의 삶이 꽃처럼 새롭게 피어납니다.

“즉심즉불! 마음이 곧 부처다.”
스승의 이 한마디가 그 사람의 삶을 바꿔 놓았습니다. 법문의 위력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좋은 경전이 많고 그 속에는 좋은 말들이 많이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 한두 마디라도 마음에 닿아서 깨침을 준다면, 그것이 평생 나의 정신적인 양식이 됩니다.
경전을 읽을 때 그런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경전을 읽으면서, ‘내가 평생 먹고 쓰고 활용해서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양식이 얻어지이다.’라는 염원을 가져야 합니다. 건성으로 염불하듯 읽으면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중노릇은 하루살이입니다.
그날 그날을 사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현재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삽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늘 지금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도자의 정신 입니다. 구도자에게는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불교 수행에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또하나는 자비의 길입니다. 지혜는 자기 형성의 길이며 , 자비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의 길입니다. 어느 한가지라도 결여되면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연기법의 공식인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과 친척과의 관계, 형제간의 관계, 이것도 연기법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평생 몇 번이나 둥근달을 볼까?

먼저 우리들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 자유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영원히 빈 껍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절제의 미덕을 배우려면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살아가는 기술입니다. 여기 삶의 기술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요.
또 무엇이든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성급하게 움켜잡지 마십시요.
또 오래된 것을 아름답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기도를 하십시요.
추상적이고 막연한 원보다는 구체적인 원을 세우십시오.

붉은색만 단풍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단풍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면 잘못 본 것입니다. 가을 산에는 붉은 잎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란색과 갈색 잎도 있고, 바람과 바위도 있고, 비가 오다 개면 바위에 돋아난 이끼도 파랗게 살아납니다.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어느 한 빛깔만으로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멈춘다면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미움이 싹트고, 전쟁이 일어나고, 무차별적인 환경 파괴가 일어납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원망이 생겨나고, 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욕망의 좌절이 찾아옵니다. 나의 기준이 모든 번뇌의 원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한 무아(無我)란 바로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면 ‘바르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의 진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그런 경험들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많을 때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도 바깥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망막에 상이 그려질 뿐 실제로는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복잡하면 눈앞의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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