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부활

톨스토이, 네흘류도프, 마슬로바(카츄샤)

부활(톨스토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네흘류도프라는 공작이 배심원으로 참가한 재판에서 한때 그의 고모집에서 하녀이자 양녀로 머물던 마슬로바(카츄사)라는 여자를 맞닦드리며 시작한다. 그는 그녀와 정을 나누고 그 댓가로 돈을 지불하고 잊고 있었던 여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으며 임신한 몸으로 그의 고모의 집에서 쫓겨나 창녀의 인생을 살며 고객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죄를 선고받고 유형생활을 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젊은 날의 탐닉을 사죄하고자 귀족이라는 신분에 의해 맺어진 인맥을 총동원해 그녀를 감옥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카츄샤의 마음은 이미 정리된 상태였다고…..

​네흘류도프는 이 과정을 거치며 당시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한 면(토지의 사유화, 종교, 사법제도)들을 들여다 본다. 그는 결국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인간본연의 모습을 성찰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귀족이었던 톨스토이 생전의 생각과 행동을 주인공을 통해 고스란히 보는듯했고, 독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로 ‘부활’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톨스토이는 사법제도의 부조리에 대해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고 벌하며 교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 이 일은 인간의 역할이 아니라 신의 역할이라고 강변한다.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도 사제와 신자간의 교감부재를 지적하며 후반부의 한 노인의 변을 들어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을 제시한다. 책의 첫머리에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제대로 실천하라는 것. 토지의 사유화문제는 네흘류도프가 농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려한 것으로 드러낸다.

​톨스토이의 러시아라는 시공에서 한참을 건너뛴 지금의 한반도에서도 네흘류도프가 느꼈을 부조리 못지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면상이 필름처럼 돌아간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의 시간속에서 별 일을 다 겪었지만 요즘은 솔직히 좀 허탈할 정도의 뉴스가 끝도 없이 흘러넘쳐 요지경 속 같다.

사람은 앞날에 대해 희망이 있을 때 신나게 살 수 있다. 우리도 좀 그래봤으면 좋겠다.

<책 중에서>

수십만 인구가 도시에 모여 서로 부대끼며 사느라 자신들이 사는 땅을 아무리 망쳐 놓았어도 풀 한포기 자랄수없게 길에다가 돌을 아무리 깔아놓았어도, 돌 틈을 비집고 나오는 풀마저 뽑아치웠어도, 석탄과 석유 그을음으로 대기를 더렵혔어도, 나무를 마구 잘라내버렸어도, 동물과 새들을 쫓아버렸어도, 도시의 봄은 봄이었다…..식물들도 새들도 곤충들도 어린아이들도 흥겨워했다. 그러나 다 큰 인간들, 성장을 다한 어른 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괴롭힐 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들에게 신성하고 도 중요한 것은 이 봄날의 아침도 아니고 평화와 화합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이 봄의 아름다움도 아니었다.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들만 신성하고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제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어제와 같은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그가 믿는 것은 이 신앙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믿음이었다. 그로 하여금 이 신앙을 굳게 믿도록 해준 것은 그가 지난 18년 동안 이 신앙의 요구 사항을 실행해온 것에 대해 일정액의 월급을 받았다는 사실이며, 그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 아들은 중학교에 보내고 딸은 신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예외적으로 이들 중 몇몇 사람은 이 신앙이 사람들에게 행하고 있는 모든 기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의미도 없는 말 속에 무엇인가 신비로운 힘이 들어 있어 그로 인해 이 세상속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축복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도둑놈이 자기의 교묘한 솜씨를 자랑하거나, 창녀가 자기의 음탕함을 숨기지 않거나, 살인자가 자기의 잔인성을 드러내면 보통 사람들은 놀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는 이런 사람들의 환경이나 세상은 한정되어 있으며, 보다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그런 환경이나 사회와는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일까? 부자는, 그러니까 자기의 부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은 부자는 약탈자가 아닌가? 장군은, 자기의 승리를 자랑하는 장군은 살인자가 아닌가? 권력자는, 막강한 힘을 소유한 권력자는 결국 폭력을 일삼는 자가 아닌가? 우리가 부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에게서 인생관과 선악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이런 왜곡된 관념을 소유한 사람들의 사회가 더 크기 때문이며, 우리 역시 그 사회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죽을 힘을 다해 일하고도 배불리 먹지를 못하는데 우리는 이런 끔찍할 정도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제가 바라는 건 우리 모두가 일을 하고 다 같이 함께 먹자는 것입니다.”​

토포로프의 직무는 폭력을 포함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를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본질상 신에 의해 세워진 것이므로 지옥의 문에 의해서도, 인간의 그 어떤 노력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것에도 위협을 받지 않는 신성한 교회를 수많은 관리들을 거느린 트포로프가 수장으로 있는 인간의 조직으로 유지하고 보호해야만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네흘류도프는 아주 단순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리고 무슨 권리로 일련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통을 주며 매질을 하고 죽이는가? 그들도 그들 자신이 감금하고 고통을 주며 매질을 하고 죽이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사람들인데 말이다. …학술서적에는 그야말로 학문적인 명석하고 흥미있는 지식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 즉 ‘무슨 권리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처벌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토지는 어느 누구의 사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토지는 사고파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임대를 해줘서도 안 되죠.”(니키포로비치)./ “사유권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권리요. 그 사유권이 없다면 토지를 경작하는 데 아무도 흥미를 갖지 않을 겁니다. 사유권을 파기해보시오. 그러면 우리는 야만 상태로 되돌아갈 겁니다.” 토지 사유에 대한 갈망 그 자체가 토지 사유가 필요한 증거라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반론을 되풀이하면서 이그나티 니키포로비치(네흘류도프의 매형)가 마치 이 문제의 권위자라도 된 양 말했다. / “그 반대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토지가 방치된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토지를 경작할 줄도 모르면서 건초 더미 위에 누워 있는 개처럼 지주들이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주지 않는 상황이 근절되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록 한 시간만이라도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어떤 한 경우에 국한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범죄가 없을 텐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여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어떤 인간은 부분적으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행동하거나 또 어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면서 행동하게 마련이었다. 어느 정도까지 자기 생각을 따르느냐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르느냐에 따라 사람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정치범들이 자신들의 활동에 고차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정부가 그들을 지나치게 중대시하고 그들에게 참혹한 형벌을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긴 결과였다. 그러다보니 정치범들도 그들이 겪어온 참혹한 형벌을 앞으로도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존재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바로프)그가 생각하는 혁명이란 농민의 생활 근본을 뒤집어 엎는 것이 아니었다. 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세든 다윈이든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었다. 그의 동료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론인 진화론도 그에게는 창조론과 똑같이 지적 유희에 불과했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그에게 관심 밖이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가의 문제가 항상 우선했기 때문이었다…..송충이가 나방으로 변하고 도토리가 참나무로 변하는 것처럼 인간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해간다는 신념이었다.

bookmark_border좁은문

앙드레지드, 제롬과 알리사

[소설]좁은문/앙드레지드 – 사랑의 애절함과 답답함 사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제롬은 방학 때마다 두 살 위인 알리사와 한 살 아래의 줄리엣, 이 두 외사촌이 있는 삼촌 집에 내려가 함께 살았다. 알리사는 정숙한 반면 줄리엣은 말괄량이였다. 알리사의 어머니는 바람기가 있는 여인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버리고 젊은 장교와 놀아났다. 그 뒤로 알리사의 신앙은 깊어졌고, 보다 청순한 것을 찾게 되었다. 제롬은 주일 예배 때 알리사와 더불어 들은 설교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제롬은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넘어 하나님의 길에 이르듯이 노력한다면 알리사와의 사랑에 결실을 가져오게 되리라 믿었다. 쾌활한 줄리엣은 알리사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몰래 제롬을 사랑하고 있지만, 반항적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만다. 제롬은 알리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알리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자고 대답한다.

제롬은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알리사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고, 알리사도 여기에 대해 답장을 보낸다. 그러나 만나서 결혼을 종용하면, 알리사는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함을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고 대답하여 제롬을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편지 속의 알리사와 현실의 알리사가 다름에 제롬의 마음은 피곤해진다. 제롬은 알리사를 단념하고 3년의 세월을 보낸다. 오랜만에 둘이는 다시 만나게 되지만 알리사는 너무나 정결한 존재였다. 그녀는 스스로 지상의 사랑을 버리고 ‘좁은 문’을 거쳐 행복에 이르는 길을 걸으려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알리사는 수정 목걸이를 걸지 않고 있었다. 제롬은 쓸쓸한 마음으로 알리사의 곁을 떠났다. 알리사는 “내가 수정 목걸이를 걸지 않고 만찬에 나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돌아가 주세요”라고 미리 선언했던 것이다. 그 뒤, 제롬은 알리사가 요양원에서 숨진 사실을 줄리엣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 알리사의 일기에는 “하나님이시여, 다시 한 번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라는 구절을 비롯해, 몹시도 제롬을 사랑했지만 ‘좁은 문’인 하나님에의 봉사 때문에 고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좁은 문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 4. 1., 김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