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 8

22. 피라미드의 해체

  • 반구정과 압구정 이야기. (황희와 한명회)
  • 만해와 일해
  • 정도전과 이방원

23. 떨리는 지남철

양명학의 핵심은 ‘심즉리’心卽理입니다. ‘마음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주체성의 선언입니다. 주자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였습니다. 성性이란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心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천명天命, 천성天性, 천리天理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실천이 진리를 담보한다는(만든다는) 주장입니다.

양명학의 3강령은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입니다. P.400

지행합일은 양명학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주자학은 지知와 행行을 선후관계로 놓습니다. 선지先知, 먼저 알고 후행後行, 나중에 행하는 구도입니다. 독서궁리讀書窮理, 즉 책을 읽음으로써 진리를 도달한다는 논리입니다. 양명학에서는 독서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아닙니다. 지知와 행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독서를 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통해서 삶의 현실 속에서 진리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것을 사상마련事上磨鍊이라고 합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연마해야 합니다. P.401

‘Here and Now’ 그리고 How가 물리 방식의 실사구시라면, ‘Bottom and Tomorrow’와 Why가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양명학과 강화학은 근본을 천착합니다.
지남철의 여윈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입니다. 어느 한쪽에 고정되면 이미 지남철이 아니며 참다운 지식인이 못됩니다. P.403

피 팔기전 찬물을 가득 마신 어려운 가정의 소년 가장 이야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내게는 가책을 받았고 지금도 가책을 받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고집은 반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가족의 끼니를 위해서 병원의 새벽 수도꼭지에서 찬물을 들이키며 그가 감당해야 했던 양심의 가책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양심’이라는 단어를 만날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P.406

‘양심적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낮습니다. 낮을 뿐 아니라 부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며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란 모름지기 양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역량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라 해야 합니다. P.408

24. 사람의 얼굴

나의 연상세계는 대단히 창백했습니다. 노래의 연상세계와는 달리 내가 구사하는 일상적 개념의 연상 세계는 매우 관념적이었습니다. ‘실업’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경제학 개념이었습니다. ‘빈곤’은 엥겔계수가 연상되었습니다. 메마른 이론과 개념으로 뒷바침되고 있는 생각이란 얼마나 창백한 것인가. 창백한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P.411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 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것처럼. P.418

이 괘의 이름이 박剝입니다.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맨 위의 상효 하나만 양효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언제 음효가 될지 알 수 없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석과불식은 바로 이 마지막 하나 남은 양효의 효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석과불식은 ‘씨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419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찹니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지혜이며 교훈입니다. 이제 이 교훈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소임을 하나씩 집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엽락葉落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잎사귀는 한마디로 ‘환상과 거품’입니다. 엽락이란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불혹不惑과 같은 뜻입니다.

가망 없는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불혹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품을 청산하는 단호함입니다. P.420

다음이 체로體露입니다. 그림에 보듯이 엽락 후의 나무는 나목裸木입니다.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뼈대가 휜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구조와 뼈대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P.421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분糞은 ‘거름’입니다. 분본이란 뿌리(本)를 거름(糞)하는 것입니다. 그림이 보여줍니다. 낙엽이 뿌리를 따뜻하게 덮고 있습니다.

뿌리가 바로 사람이며 사람을 키우는 것이 분본입니다. P.421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 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P.422

수형생활 10년차의 재소자가 자살했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는’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이유였습니다. P.424

독버섯 이야기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P.426

언약은 강물처럼 흐로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P.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