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mark_border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 6

14. 비극미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인공은 죽을때 말을 많이 하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엑스트라는 금방 죽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P.251

미美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P.252

15. 위악과 위선

교도소 재소자들의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악’僞惡입니다. ‘위선’僞善과는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먹이 있거나 성질이 있어야 한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저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에 맞기도 합니다. P.266

노촌 선생님 말씀은, 야쿠자 방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폭력 투쟁이고 노인 방은 이론 투쟁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폭력 투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승패가 납니다. P.272

16. 관계와 인식

관계와 애정 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이 글의 단초가 된 일본인 기자는 한국 근무 4~5년차의 베테랑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빈번하게 이사하는 까닭은 기마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가를 전전하는 고달픈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P.280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 P.283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인간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입니다. 입장의 동일함을 좁은 의미로 읽지 않기 바랍니다.

지식인은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입니다. P.284

17. 비와 우산

“네가 껌 사는 이유를 내가 얘기할까?”

그가 밝힌 껌을 산 이유는 껌팔이 소년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것이라는 논리였어요.

그러는 너는 미안함을 느끼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나는 추호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단호한 답변이었습니다.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쟤는 하루종일 껌 한개도 못 팔겠네.”

“물론 못 팔지! 그러나 세상에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껌팔이가 없는 사회가 되는 거지!”
나눔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결코 무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칼 같은 그의 선언은 역시 젊은 시절의 이념적 언어였습니다. 우선은 껌부터 사는 것이 순서인것입니다. P.295

18. 증오의 대상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평화시장에는 전체 인원 2천 명에 공용 화장실이 3개 밖에 없었습니다. 화장실 앞에서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끊이지 않는 싸움, 그것이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성과 아무 상관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P.303

여름 잠자리의 옆사람과 싸가지 없는 동료 재소자에 대해서 키워 왔던 증오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리고 감옥 속에 않아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기도 하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겨울 독방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증오 역시 그때의 증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반성을 합니다. 증오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 감각에 의해서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랍니다. P.304

그때는 그나마 여름과 겨울이 더위와 추위로 칼같이 나뉘어져서 여름에는 겨울을 그리워하고 겨울에는 여름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만큼 겨울도 춥지 않고, 여름도 그때처럼 덥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서슬 푸르게 벼를 수 있는 계절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것인가가 과제라면 과제입니다. P.305

19. 글씨와 사람

서도에서 더 중요한 것은 환동還童입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합니다. 전 시간에 대교약졸을 소개하면서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 하다고 했습니다. 이 대大라는 것은 최고의 의미이고 노자의 경우 최고의 준거틀은 당연히 자연이라고 했습니다. 기교라는 것은 반자연反自然입니다. 최고의 기교란 졸렬한 듯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입니다.